출범 12년 된 수서고속철 통합...검증 없는 ‘막무가내’ 안 돼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2025-12-30

고속열차인 SRT를 운영하는 수서고속철도(SR)가 철도사업 면허를 받은 건 12년 전인 2013년 12월 27일이었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출자해 설립한 법인 형태였으며, 이때는 SRT가 아닌 ‘수서발 KTX’로 불렸다.

앞서 이명박 정부에서 SRT 운영을 민간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하자 철도노조와 시민단체 등이 “철도 민영화는 안 된다”며 반발해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그 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공부문 내 경쟁도입으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면허 발급 관련 발표문에서 “독점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는 철도에 경쟁체제를 도입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만성적자에 들어가던 국민혈세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서 장관은 또 “철도 경쟁체제를 통해 요금이 내려가고 서비스가 향상되면 국민이 그 혜택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며 “수서고속철도의 공영구조를 유지하겠다는 정부와 코레일의 입장은 확고하다”고 강조했다.

3년 뒤인 2016년 12월 9일 SRT가 개통했다. 요금은 KTX 보다 10%가량 저렴하게 책정됐고, 같은 목적지라면 서울역이나 용산역 출발 KTX보다 운행거리가 짧은 덕에 소요 시간도 더 적었다.

SR에 따르면 지난 9년 동안 이용객은 총 2억 500만명에 달하며, 하루 평균 승객은 7만명선이다. 좌석이 모자라 예약대란이 벌어질 정도다. 참고로 2004년 4월 개통한 KTX는 지난 11월에 누적 이용객 12억명을 넘어섰다.

SRT가 운행하면서 비교 대상인 KTX의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코레일이 경영에 부담된다며 KTX의 마일리지 제도를 폐지했다가 SRT 개통에 맞춰 이를 되살린 게 대표적이다.

이 사이 SR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뒤인 2018년 2월에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서 공기업이 됐다. 이듬해 1월에는 코레일과 동일한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됐다. 이렇게 보면 SR의 공영구조를 유지하면서 경쟁토록 하겠다던 서 장관의 약속은 정권이 바뀌면서 더 확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경쟁이 아닌 통합으로 급격히 방향타가 바뀌었다. 추진 속도도 이례적으로 빠르다. 국토부는 내년 3월부터 KTX·SRT 교차운행을 시작하고, 내년 말까지 코레일과 SR 간의 운영기관 통합을 하겠다는 로드맵을 지난 8일 발표했다. 이틀 뒤 개최된 정부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선 코레일·SR 통합 안건까지 전격 의결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소비자인 국민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나 통합과 경쟁의 장단점을 비교·검증하는 전문가 용역은 한 번도 없었다. 정부가 귀를 닫은 채 고속철 통합으로만 내달리는 이유는 지난 12일 열린 국토교통부 업무보고에서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코레일·SR) 통합은 잘되고 있나? 빨리 좀 하라”며 “그거 민간에 매각하려고 분리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 “뭘 자꾸 알토란 같은 걸 떼가지고 민간에 팔아먹으려고 그러냐”라고도 했다.

SRT를 누군가 민간에 넘기기 전에 시급히 합쳐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SR이 걸어온 과정은 민간 매각과는 정반대다. 또 매각 추진 사례는 아직은 확인된바 없는 데다 공기업은 대통령 모르게 팔 수도 없다.

이 대통령은 공약이란 점도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도 대선 때 노동단체와 고속철 통합을 담은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이후 철도 노사 대표와 전문가, 소비자 대표 등이 참여한 ‘거버넌스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한 끝에 “코로나 19로 인해 경쟁체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된 기간(2017~2019년)이 3년에 불과해 효과 분석에 한계가 있다”며 통합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경쟁과 통합의 효과 및 부작용을 객관적으로 치밀하게 평가한 뒤 통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동민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급하게 두 기관을 합칠 게 아니라 통합에 대한 효과를 면밀히 검토하고 단계별로 통합을 추진하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강승모 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과 교수도 ”KTX·SRT 교차 운행, 내년 말부터 도입될 신규 차량 투입 등의 효과를 면밀히 따져 본 뒤 통합을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굳이 운영 효율성 저하 및 운임 인상 등이 우려되는 독점체제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앞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인 2017년에 서울메트로(서울지하철 1~4호선)와 도시철도공사(5~8호선)를 합쳐 출범한 서울교통공사 사례를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박민규 한라대 철도운전시스템학과 교수는 “당시 경영 효율화와 안전관리 일원화가 통합의 핵심 논리로 제시됐지만 오히려 인건비 부담은 가중됐고, 경영 효율화도 체감하기 어렵다”며 “조직 개편 과정에선 현장경험 단절과 책임구조의 혼선이 발생해 안전관리 측면에서도 부담이 더 커졌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고속철 통합만을 추진할 게 아니라 철도산업구조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같은 준비 없이 통합에 나섰다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며 단행된 ‘철도구조개혁’의 틀만 흔들리기 때문이다.

2004~2005년에 시행된 철도구조개혁은 철도청이 철도 건설과 운영을 독점하면서 나타난 비효율과 서비스 저하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한 취지였다. 거액이 드는 철도 건설은 준정부기관인 한국철도시설공단(현 국가철도공단)이 맡고, 철도 운영기관도 다변화해서 대국민서비스를 높이고 효율도 증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

그러나 고속철이 합쳐지면 또다시 코레일과 국가철도공단만 남게 된다. 만약 이 둘까지 통합된다면 다시 옛 철도청으로 회귀하고, 철도구조개혁의 취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고속철 통합이 갖는 의미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충분한 토론과 치밀한 분석, 그리고 검증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다. 자칫 섣부르게 통합했다간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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