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삶이 힘들 때 추억의 힘을 빌어서 거기서 벗어난다. 추억이란 우리 안에서 지속하는 현존이다. 추억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바래지만 그것이 아주 사라지는 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추억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이다. 추억과 비밀은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내면의 재화이다. 한 사람이 가진 인격과 취향은 과거라는 골짜기에서 양조(釀造)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은 과거가 머금은 빛들로 빛날 수 있다. 먼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게 스무 살은 암울하고 칙칙했다. 글을 쓴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백수로 떠돌던 시절이다. 그 시절의 여성들은 더 환하게 웃었는데 그 웃는 얼굴이 얼마나 눈부셨던지! 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여성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에도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피고, 가을 내장산의 단풍은 볼만했다. 물은 낮은 지대로 흘러가고, 불꽃은 수직으로 타올랐다. 강변의 버드나무들은 푸르고, 가을엔 북국의 기러기 떼가 한반도로 날아왔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더 너그럽고, 배움이 깊지 않은 아버지들은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성심을 다해 일했다.
나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고은 시집,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단편과 시를 모은 ‘이별 없는 세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 수록된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학선집’ 따위를 경전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한량처럼 빈둥거리던 나는 사실은 서울의 시립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시와 철학에 정진하던 청년이었다. 가끔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거나 명동 입구 카페 데아뜨르에서 연극 관람을 했다. 그리고 굶주린 하이네가 먹잇감을 찾듯이 ‘르네상스’나 ‘필하모니’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영혼이 고양되는 찰나에 취했다.
그 무렵 문학과 예술에 목말라 하던 내게 군 입대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본적지인 충남의 신체검사장을 찾아갔다. 군인들은 신체검사를 받는 장정들에게 반말이니 욕설을 내뱉으며 모욕을 주었다. 나는 신체검사에서 대한민국 청년의 평균 체중에 미달한 탓에 무종 판정을 받았는데, 그건 이듬해 신체검사를 다시 와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로 돌아와 ‘르네상스’에 가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속으로 들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 작가 하일리히 뵐의 소설이던가? 한 어린 병사가 징집되어 열차에 타기 직전 한 건물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어디선가 울려 나오는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 전곡을 들을 수 있다면 제 인생의 반을 떼어 주겠다고 말하던 어린 병사는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신체검사에서 낙방을 하고 돌아오던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하고 비장했던가! 그건 내가 전쟁터로 향하는 어린 병사의 가엾은 영혼에 빙의된 상태였던 탓이리라.
추억은 늘 실제 경험에 기반 하지 않는다. 철학자 샤를 페팽은 “우리는 과거를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추억은 재가공되고, 뇌를 이루는 850억 개의 뉴런과 그보다 더 많은 시냅스들의 작용하는 가운데 그 정체가 바뀐다. 그것은 추억이 경험과 몽상이 상호 삼투하며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기억의] 재구성’(샤를 페팽,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 163쪽)이다. 추억은 좋은 시절을 더 화사하게 윤색하고, 끼니를 거르던 가난의 누주함도 그리워하게 만든다. 추억에는 우리를 너그러운 사람이 만드는 힘이 있다. 고백컨대, 15세부터 시를 썼던 볼프강 보르헤르트를 동경하고(나도 15세부터 시를 썼다), 스무 살의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영혼이 찢긴 채 삐적 마른 몸으로 떠도는 한심한 영혼이었다. 나를 성장으로 이끈 창조적 약동, 생의 리듬들은 그 시절의 정처 없음과 방황, 나른한 독서, 음악에의 열광 등에서 나왔다. 오늘 내 삶에 조금이라도 빛나는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저 암울한 어제에서 온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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