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는 위계를 가린다

2025-03-03

어떤 죽음은 앞선 죽음의 결과다. 죽음에 이른 이유가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을 때 또 다른 죽음은 이어진다. 지난해 9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자살한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의 죽음으로 ‘무늬만 비정규직’인 방송사의 문제가 다시 드러났지만 5년 전에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다.

2020년 2월4일 자살한 이재학 PD 역시 오요안나씨처럼 ‘프리랜서’였다. 그는 14년간 청주방송에서 일하는 동안 2015년 14편, 2016년 12편, 2017년 11편 등 쉴 새 없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프로그램의 아이템, 방송 구성안, 촬영 장소 등을 수시로 CP, 국장에게 보고했고 결재를 받았으며 지시에 따라 일했다.

이 PD는 ‘정규직’처럼 쓰였지만, 필요 없어지자 ‘프리랜서’가 됐다. 2018년 4월 작가, 조연출 등 동료 스태프의 수당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가 프로그램 하차를 통보받았다. 이 PD는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 도움을 받아 근로자 지위 확인의 소를 제기했지만 청주지방법원은 그가 청주방송의 ‘근로자’가 아니라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씨는 1심 판결문을 받아본 직후 자살했다.

오요안나씨도 생전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고충 처리를 회사에 요청했다. MBC는 묵살했다. 필요할 때는 정규직처럼 일하도록 하지만, 정작 도움을 요청하면 ‘프리랜서’라는 딱지를 내밀며 배제하고 외면하는 일은 이번에도 반복됐다. 오씨의 죽음 이후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대상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애초에 그는 근로기준법 ‘바깥의 존재’다. 직장 내 괴롭힘 요건은 직장에서의 지위·관계상 우위를 이용했는지 등 3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사각지대에 서 있는 이들에게 이 논의는 의미가 없다.

‘바깥의 존재들’에게는 위계 자체가 없다. 이재학 PD는 14년간 일한 곳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얻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지만 청주방송은 이씨를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킨 담당 국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법정에서 담당 국장은 시종일관 이씨가 청주방송의 직원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이씨에게 일을 지시했던 ‘우위를 가진 존재’가 드디어 법원에 나타났지만 이씨는 국장의 증언을 통해 존재를 부정당했다.

2022년 방송작가들이 법상 MBC의 ‘근로자’라는 판결이 나오는 등 지난 5년간 ‘무늬만 프리랜서’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따랐다. 그러나 방송사들의 꼼수는 더 고도화되고 있다. 사무실에 고정석을 없애고, 카카오톡을 통한 업무지시 금지 지침을 세우는 등 수법은 다양했다. 판결이 나와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오요안나씨 사건 이후 특별근로감독을 진행 중이지만 방송사 전반에 대한 기획근로감독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책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에서 윤지영 변호사는 이재학씨가 보냈던 e메일을 적었다. “언젠가 고생한 거 알아주겠지란 생각으로 달려온 시간이 너무 억울하네요. 제 다음 후배들은 정규직, 비정규직 설움을 못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질 수 있을까. 또 다른 죽음이 오요안나씨 죽음의 결과가 되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가 더 강하게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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