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0일 취임한 미국의 제47대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협정에서 재탈퇴하고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북극 한파로 야외 취임식을 못하고 의사당에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들은 선거 캠페인 슬로건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에 따른 것이다.
작년은 산업혁명 이후 가장 무더운 해로 기록됐으며, 세계 각지에서 가뭄, 홍수, 폭풍 등 극단적인 기후 재난이 속출했다. 지난 1월 발생한 미국 캘리포니아 LA 산불은 1만7000여채 가옥 소실, 80여명 사상자·실종자, 4조원 이상 재산 손실을 초래했다. 기후·환경 재난이 새로운 일상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에 대해 1기 정부와는 다른 정책을 기대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취임식 날 화려하게 펼쳐진 행정명령 서명 행사 속에 묻혀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한 조치 중 상당수가 기후·환경 문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는 파리협정 재탈퇴다. 미국은 이해관계에 따라 협약 체제에 대한 지지 또는 거부 입장을 명확히 해왔다. 1992년 조지 부시(시니어) 대통령은 선진국들 중 가장 먼저 기후변화협약을 비준하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1997년 알 고어 부통령은 교토 기후총회에 참석해 의정서 채택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1년 조지 부시(아들) 대통령은 미국 경제에 큰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며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했다.
2015년 12월 12일 파리협정이 채택됐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과 두 차례 정상회담 및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협정 타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2017년 1월 20일 트럼프는 제45대 대통령 취임 당일 파리협정 탈퇴를 발표했다. 당시 협정 적용 시기가 아니었기에 파급 효과는 크지 않았다. 이후 2021년 1월 20일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파리협정 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올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파리협정 재탈퇴는 2017년 사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선거인단과 과반수 이상의 유권자 지지를 받았으며, 공화당이 상·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추진을 저지할 세력이 당분간 부재하다.
지난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기후총회 'COP29'에서 어렵게 합의된 연간 3000억달러 기후 재원 조성도 최대 공여국인 미국의 불참으로 목표 달성이 요원해졌다. 두 번째는 미국의 화석 에너지 생산을 독려하는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 선언이다. 미국 연방정부 기관들은 천연가스, 석유, 석탄 등 천연자원 개발을 용이하게 하는 신속 승인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여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와 함께 미국의 온실가스 배출 증가가 예상된다.
세 번째는 플라스틱 사용 권장이다. 2022년 유엔환경총회는 21세기 가장 심각한 환경오염 중 하나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지목했다. 유엔환경계획(UNEP)에 따르면 전 세계 플라스틱 쓰레기양은 2022년 8100만톤에서 2040년 1억1900만톤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작년 12월 부산에서 열린 플라스틱 협약 채택을 위한 최종 협상회의에서도 산유국 그룹들의 강경한 반대로 합의문 채택이 좌절됐다. 중국 다음으로 플라스틱을 많이 생산하는 미국이 입장을 선회함에 따라 올해 안에 구속력을 갖춘 협약 채택은 어려워졌다.
또, 트럼프 정부는 보조금 지급 중단을 통해 전기차 확대 정책을 폐기하고 내연기관 자동차의 배출 기준을 완화했다. 이는 미국 소비자의 선택권을 우선시한다는 조치였다. 이외에도 연방정부 관할의 풍력 발전 사업 허가를 중단하고, 바이든 정부의 상징적인 입법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인프라 투자 및 고용법(IIJA) 기반 예산 배정을 중단했다. 연방정부 기관 중에서는 미국 대외원조의 상징인 USAID와 환경부서인 EPA의 기능과 예산이 대폭 축소됐다.
트럼프 2기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유엔이 지구 환경의 3대 위기로 선언한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소멸, 플라스틱 오염 문제 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된다. 그러나 유엔기후변화협약 체제의 발전 과정을 보면,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조치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협약 체제의 보편적 참여를 확대하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교토의정서 비준을 거부하면서, 중국·인도·브라질·멕시코·한국과 같은 주요 개도국들이 감축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후 부시 행정부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0%를 차지하는 17개 주요 경제국들을 대상으로 '기후변화와 에너지에 관한 주요 경제국 회의체'를 제안·성사시켰다. 이 회의체는 오바마 정부에서 '주요 경제국 포럼(MEF)'으로 확대 발전해 2015년 파리기후협정 체결 과정에서 주요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017년 트럼프 1기 정부의 파리협정 탈퇴 조치는 196개 회원국이 파리협정 이행을 위한 세부 규칙을 지연 없이 채택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1월 다시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새로운 제안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트럼프 정부의 파리협정 탈퇴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다양하다. 대다수 국가는 미국의 일방적 조치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일부 국가는 이를 환영하며 동참 의사를 밝혔다.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는 유럽연합(EU) 내에서도 급진적인 기후·환경 정책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회원국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EU의 '그린 딜(Green Deal)' 정책도 속도를 조절하며 EU 산업의 경쟁력 증진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주요 경제국들도 2035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에 있어 의욕보다는 실행 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 보급, 산업 및 발전 부문의 저탄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도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지경학적 불확실성과 국내 정치적 불안이라는 복합적 어려움 속에 있다. 기후·환경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우리는 정파를 초월해 국민적 여론을 결집해야 하며, 트럼프 정부의 정책 변화가 위기 속에서 혁신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재철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필자〉최재철 재단법인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은 1981년 외교부 입부(외무고시 15회) 후 다양한 해외 공관 및 국내 부서에서 근무하며 기후·환경 분야의 전문성을 쌓아왔다. 외교부 기후변화대사로서 2015년 파리협정 협상수석대표로 활약, 국제사회에서 기후변화 대응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와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의장, 주프랑스대사를 역임했다. 지난 1월 기후변화센터 제6대 이사장으로 선임돼 기후변화 대응 글로벌 연대 강화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