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스스로 각성해 사회를 각성시키려 한다. 그러나 각성하길 원하는 사회 주체들은 정작 영화를 볼 시간과 여유가 없다. 반대로 각성의 대상들은 영화에 무관심하다. 계급사회에서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이 고립되는 이유이다. 대만 영화 ‘왼손잡이 소녀’의 운명이 딱 그렇다. 뼈아픈 모녀 3대의 가족 얘기이고 비교적 참담한 얘기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 귀 기울일 뿐, 정작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국내에서는 개봉 일주일 만에 전 극장에서 사라졌다. VOD, IPTV, OTT를 떠돌겠지만, 극소수의 지지자들만이 남을 것이다.

배경은 타이베이의 야시장이다. 엄마 슈펀(채숙진, 蔡淑臻)은 큰딸 이안(마사원, 馬士媛)과 둘째 딸 이징(엽자기, 葉子綺)을 데리고 국수 가게를 연다. 첫째는 갓 성인이 된 나이지만 둘째는 아직 5살이다. 두 아이는 아빠가 다르다(고 짐작된다. 사연이 있어 보인다). 세 모녀는 사는 게 각박하다. 슈펀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늘 월세를 내지 못한다. 죽어가는 전 남편, 이안의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으로 보인다. 이 남자는 결국 장례 부담까지 남기고 죽는다. 죽은 남자는 한때 슈펀의 본가를 도와줬던 것으로 보인다. 중소 규모의 공장을 했고 슈펀의 엄마, 그녀의 자매들을 도와줬지만 정작 부도가 난 후에는 따돌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들 돈 버는 방식이 이상하다. 슈펀만 정상적이다. 노동을 통해 번다. 비뚤어진 큰딸 이안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엄마보다 더 벌어!” 이안은 담배 가게 같은 데서 일하는데 정작 여기서는 불법 약물로 돈을 번다. 이안은 늘 야한 옷을 입고 가게에 나와 호객행위를 한다. 가게 사장과도 수시로 섹스를 한다. 결국 이 관계는 사달이 난다. 슈펀의 엄마이자 이안과 이징의 할머니도 수상하다. 그녀는 늘 미국을 나다닌다. 불법 이민이나 밀수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둘째 이징은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친다. 아이는 그것이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 악마의 손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 밑에 포르노 테이프나 깔고 살아가는 이징의 할아버지 탓이다. 그는 전족(纏足, 발을 작게 만들려고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꽁꽁 묶는 악습) 세대의 남자로 이징에게 왼손은 악마의 손이니 쓰면 안 된다고 윽박지른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이는 자기 팔보다도 큰 식칼을 들고 왼손을 자를까, 말까 망설이기도 한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도 한다. 아이는 엄마 슈펀의 전 남편(자신에게는 의붓아버지)이 죽고 남긴 미어캣을 키우다가 그 악마의 손 때문에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할아버지라는, 쓸모없는 인간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가 뒤로 갈수록 남자는 점점 불필요한 존재감으로 변화됐다. 현대 영화는 대체로 남자란 존재를 쓸모없거나 아예 사라지는 쪽이 도움 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 영화 ‘왼손잡이 소녀’에 나오는 남자는 네 명인데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악습을 전파하고, 아이의 외삼촌은 보아하니 집안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며, 이안의 가게 사장은 그냥 놈팡이이다. 엄마 슈펀의 가게 옆에서 노점을 하는 남자는 그나마 착한 인물이지만 그다지 능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지적인 남자는 영화 속에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여성성이 강해져서 여성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만이 가족과 세상을 지켜 낼 수 있기에 그렇게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할아버지가 잘못 알려 준, ‘왼손은 악마의 손’이라는 등식은 이들 세 모녀가 살아가는 대만 사회의 모든 중층 모순을 한 번에 얘기해 주는 메타포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이 삼단 사단의 케이크처럼 쌓여 있고 섞여 있다. 여성들은 계급의 하단에서 출발하기가 십상이며 그렇기에 몸을 팔기도 하고, 그러다 임신이 돼버리면 원하지 않았던 가족관계 때문에 괴로워지는데 그게 경제적 문제로 거듭 압박이 가해져 다시 계급의 하단 구조로 떨어지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어찌 보면 여성 개인의 몫만은 아니게 된다. 여성은 먼저 ‘여성들’이 되어야 한다. 영화 속 모녀 셋도 결국 그 길만이 자신들이 생존하되, 존엄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모색하게 된다. 영화 ‘왼손잡이 소녀’는 참담하지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낙관적이거나 쓸데없는 희망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인생이 꼭 비관적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 애쓴다. 비관의 지성을 낙관의 감성이 이어간다.

‘왼손잡이 소녀’는 어쩌면 큰 딸 이안의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 속 또 한편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아이는 스무 살 안팎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엄마 슈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슈펀과 이안은 갑을의 모녀 관계가 아니며 이안이 오히려 엄마를 가르치는 쪽이다. 엄마 몰래 죽어가는 아빠를 찾아가 더 이상 엄마에게 오라는 소리 하지 말라고 표독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아빠는 죽을 것이고 살아 내야 할 엄마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가게 놈팡이 남자와의 관계로 임신하고 유산하는 과정에서 이안은 부쩍 성장한다. 점점 더 어린 동생 이징을 살피는 모습이 모성의 본체를 닮아가기 시작한다. 이안이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안은 이징을 데리고 시장을 다니며 아이가 훔친 물건을 돌려주고 주인에게 잘못을 빌게 한다. 아이는 당연히 용서받는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이안은 세상과의 타협점, 화해의 방법을 체득해 나간다.
한 여자가 주체성을 찾으면 주변의 여성들,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이안의 변화는 엄마 슈펀을 차분하게 만든다. 아이 이징도 더 이상 왼손 문제를 고민하지 않게 된다. 세 모녀는 어쨌든 살아갈 것이며, 그것도 존엄하게 살아가려 애쓸 것이다. 바로 그 존엄성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돈이나 섹스, 명성, 지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잃거나 얻거나 할 때이다. 계급사회에서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고 더욱더 양극화되어 가고 있지만 그나마 사회를 지켜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상대를 존엄하게 대하고 그럼으로써 연대할 수 있는 인간적 품성이다. ‘왼손잡이 소녀’는 바로 그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감독 추시경(鄒時擎)은 대만계 미국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와호장룡’ 등을 만든 리안(李安)의 후임 격이다. 칸의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5개 부문에서 수상했던 션 베이커의 프로듀서 출신이다. ‘왼손잡이 소녀’가 션 베이커와 만든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대만판 영화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그녀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프로듀서를 맡았다. 션 베이커의 작품과는 다른 질감이지만 사회 문제를 드라마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는 점에서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을 적시하는 작품이다.
대만 사회가 내부적으로 만만찮게 흔들리고 있고 그것을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는 어디서든 다 마찬가지이다. 없는 사람들,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문제는 북남미든 유럽이든 동북아든, 대만이든 서울이든 도쿄든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공명시킨다. 특수한 지역의 얘기인 척 사실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문제다. 특수와 보편은 그렇게 교호한다.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외교적 위협만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들 세 모녀의 삶 같은 것이 진짜 문제일 것이다. 한 인간, 한 가족, 야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 하나하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이념과 체제의 안보를 지키는 것일 수 있다. 그 점이 바로 ‘왼손잡이 소녀’가 웅변하는 모토다. 들어라, 세상 사람들아, 라고 영화가 외치고 있다. 일부 예술영화전용관에만 있다. 추후 OTT에서 만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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