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은 왜 수염을 길렀나

16세기까지 일본의 무사들은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얼굴에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도쿠가와 막번 체제가 들어선 뒤 250년간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사무라이들이 말끔하게 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업인 전투가 없어지자 생계 불안에 불만을 품은 하급 무사나 그 고용인들이 여전히 수염을 기른 채 치안을 어지럽혔다. 이에 막부는 ‘수염금지령’을 내렸고, 다이묘나 상층부 사무라이들은 이를 엄격히 지켰다. 그러자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수염을 기르는 것 자체가 비속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외 없이 수염 기른 천황 사진
문명국 편입 강조한 상징 조작
수백년간 야만의 표지였지만
서양 받아들인 후 인식 바뀌어
청·조선 상대로는 우월함 과시
영친왕 옆 이토 사진 수염 무성

쇄국 시대 일본인들은 열도에 근접하는 외부인(아이누, 서양 상인 및 선교사)을 야만인으로 불렀다. ‘에조(蝦夷)’라고 칭했던 아이누들은 얼굴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수염을 길렀고, 여자들은 입 주위에 수염 문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그들이 야만상태에 있음을 증명하는 저열한 관습으로 치부했다. 안면 가득 체모를 기르는 혐오스러운 외부자는 또 있었다. 나가사키에 체류하는 서양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들을 난반(南蠻·남쪽 오랑캐), 또는 게토(毛唐)라고 불렸다. 게토란 털북숭이 외국인 혹은 야만인이라는 뜻이다. 평소 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페리 제독의 얼굴을 털북숭이 도깨비 형상으로 묘사한 당시의 그림을 통해서도 수염이 외부 세력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불쾌하고 이질적인 신체적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60~70년대에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에 온 서양인 자문관, 기술자, 대학교수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근사한 수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스승’ 자격으로 일본에 온 서양인들의 얼굴에 무성한 체모를 비하해서 더 이상 ‘게토’로 부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그들의 수염을 ‘문명’과 ‘힘’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천황 따라 수염 기르기 유행

1873년에 촬영한 메이지 천황의 사진은 몸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체정치의 표본이었다.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 모양에 프랑스 대원수복을 착용하고 얼굴에 수염까지 기른 모습은 사진 속 인물의 인종적 차이만 제외하면 유럽 군주의 초상과 다를 바 없었다. 구미를 순방 중이었던 구미회람 사절단의 긴급요청으로 촬영한 이 사진은 일견 허장성세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문명국의 일원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극동에서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음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당시 일반에 공개된 메이지 천황의 몇장의 공식 사진은 예외 없이 서양 군복에 수염이 강조된 것뿐이었다. 이런 사진은 부국강병·탈아입구와 같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일종의 상징조작이었다.
메이지 천황을 기점으로 해서 권력과 권위를 필요로 하는 계급·직군에서 수염 기르기가 유행했다. 내각 각료, 군 장성부터 경찰조직의 순사에 이르기까지 수염을 다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수염이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 된 만큼 수염의 부피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했다. 영관급 장교가 장성보다 짙은 수염을 기를 수는 없었다.
유럽에서는 18세기에 가정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면도기가 시판되면서 남성들의 거의 대부분이 면도를 했다. 깔끔한 얼굴이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자 다시 남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엘리트 계층들은 산업혁명 이후 비대해진 개별 단위에서 위계와 권위의 구조를 새로 짜야 했고, 점차 여성노동자의 존재감이 확대되면서 남성성과 관록을 재확인해줄 수 있는 상징으로 수염이 다시 등장했다.
수염은 백인 인종 수월성 강조 수단

수염이 여성 및 하부계층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남성 상류계급의 신체상징이라면, 대외적으로는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인종적 수월성을 강조하는 신체정치의 수단이기도 했다. 서양 남성의 경우 유전적으로 얼굴에 수염이 많다. 반면 동양 남성은 얼굴이나 몸에 체모가 거의 없거나 성장도 활발하지 않다. 서양인들은 이런 유전적 차이조차도 인종적 우열을 가르는 지표로 삼았다. 평소 수염을 기르지 않던 서양 선교사가 일본 나가사키 포교를 앞두고 풍성하게 수염을 기른 이유는 추측 가능하다. 수염을 기른 위엄 있는 용모가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리라. 또한 19세기 후반 영국·프랑스 등의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동아시아 관련 풍자화들은 수염이 풍성한 서양인과 수염이 볼품없이 추레하거나 아예 수염이 없는 동양인이라는 대비 구도를 즐겨 채택했다. 일본의 군주가 아무리 근사한 수염이 있는 초상을 세상에 공개한들 서양인들의 눈에는 한낱 어설픈 용모의 몽골로이드(황인종)로 비칠 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제국주의의 수염과 관련된 인종주의의 대상이 되었던 일본 스스로가 이를 아시아를 상대로 해서 전용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청일전쟁 당시 사진 보도를 대신했던 판화의 일종인 니시키에(錦繪)는 일본군의 무공을 선전하는 대표적 매체였는데, 여기에서는 서양식 군복과 병기에 더해 근사한 수염을 갖춘 위풍당당한 일본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낡은 전통복장과 빈약하고 초라한 수염 속에 무기력함을 감춘 청국·조선의 병사라는 구도를 항시 채용했다. 이 경우에 그림 속 일본군 장교·장성들의 안면에 위엄을 부여하는 수염은 누가 문명의 주체이며, 어느 쪽이 승리할 자격이 있는지를 설파하는 신체상징이었다.

또한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가 내한했을 때 창덕궁에서 영친왕을 위시하여 양국의 각료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한 사진 속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해군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 등 일본의 파워 엘리트들은 조선 각료들보다 눈에 띄게 풍성한 수염을 뽐내고 있다. 전원이 서양식 예복을 차려입은 가운데 일본인들의 안면에서 한껏 강조된 수염은 개개 인물의 층위를 넘어 민족집단 간의 우열을 가늠하게 하는 특권적 징표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수염은 한국·중국인보다 상대적으로 단구인 신체적 조건을 상쇄하고 제국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 요소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본 순사는 거의 예외 없이 콧수염을 달고 나온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한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6년부터 10년간 잡지 ‘태양’(1895년 창간)에 게재된 총 1463명의 인물 사진 중 수염을 기른 사람의 비중은 82%였다. 수염을 기른 비율이 가장 높은 직군은 관료였고 가장 낮은 것은 예술가였다고 한다. 수염은 권력을 먹으면서 자랐다.
후쿠자와, 육류 섭취로 신체 개량 주문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수염에 집착했을까. 유신 이후 문명화에 매진하여 일정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일본인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인종의 굴레는 막막한 난제였다. 황색 인종의 문명국, 유색(有色)의 제국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앞뒤가 어긋나는 형용모순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계몽사상가들은 서양인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육류와 우유를 섭취하고 운동을 해서 신체를 ‘개량’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고기를 먹고 운동한다고 해서 작았던 키가 커진다는 것은 애초부터 비현실적인 목표였다. 따라서 유전적 한계 요인이 존재하는 한 신체를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꾸미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경우 타고난 신체적 조건으로 서양인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수염을 서양 문명국의 기준에 맞게 기르는 일밖에 없었다.
일본인의 얼굴에서 수염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태평양전쟁 이후부터이다. 때마침 서양에서도 수염 기르기 유행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안면에 간신히 남아있는 히틀러, 도조 히데키의 칫솔 모양 콧수염은 제국주의·전제주의의 종언을 예고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서세동점의 백척간두에서 메이지 신정부는 과감한 자기변혁을 통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천황과 고위각료들부터 기르기 시작한 수염도 애써 말하자면 신체의 자기변혁이었다. 거의 모두가 사무라이 출신이었던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불결하다고 여겨왔던 수염을 아무 거리낌 없이 길렀을 리는 만무하다. 아마도 처음에는 마치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수염을 가꿨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용모에 수염이 덧붙여지면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워지고, 반대로 아시아로부터는 멀어지는 정치적 효용을 깨닫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근대화의 큰 줄기가 서양화의 노선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에 계기하는 대외관이 탈아입구였음을 안면의 체모를 통해 되돌아본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