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국내외적으로 '너'와 '나'의 다름을 강조하면서 갈등을 심화시키는 사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너'와 '나'의 차이는 인정하되 갈등이 아닌 협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상생활 속에서 누군가의 불편을 외면하지 않는 작은 관심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척수손상 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에 주목하고 지난해 척수손상 장애인을 대상으로 인체치수 조사 사업을 수행했다. 제45회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기념해 17일 '사이즈코리아' 성과발표회에서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인체치수 조사 사업은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제품과 시설이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 참여한 척수손상 장애인들은 휠체어 사용과 관련해 좌판 너비, 등받이 높이, 발판 높이 등에서 불편을 느낀다고 답했다.
장애인들이 휠체어 사용에서 불편을 느끼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여러 원인 중에서 휠체어가 대부분 개인맞춤형으로 제작됨에도 세부적인 신체 치수까지 정밀하게 반영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척수손상 장애인의 앉은키, 몸무게, 상·하체 둘레, 근력 등 29개 항목의 인체치수 측정과 실생활에서의 휠체어 사용 장애인들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45개 문항의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이처럼 정밀한 인체 데이터와 설문 분석 결과가 휠체어 설계에 반영된다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은 많이 개선되리라고 본다.
더 나아가 조사 결과는 장애인의 공공시설 접근권 개선을 위한 정책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척수손상 장애인의 앉은키는 비장애인보다 남자는 8.4cm, 여자는 9.4cm 작고, 상체 둘레는 더 크고 하체 둘레는 더 작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이 대중교통, 승강기 등을 쉽게 이용하려면 장애인의 신체 특성을 고려해 시설물을 설계할 필요가 있는데, 이번 조사가 공공시설 설계에 기초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애인의 비만도는 비장애인보다 낮았다. 단독외출 가능 여부에 따라 장애인의 근력과 신체 치수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장애인들의 생활 방식이 신체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장애인의 건강관리와 운동 설계에도 비만도 특성과 단독외출 가능 여부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
척수손상 장애인 대상 인체치수 조사 사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려면 더 다양한 제품과 시설물이 장애인의 신체 특성을 반영해 제작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더욱 다양한 장애 유형별로 인체 데이터를 구축해야 하며, 조사 대상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올해부터 추진할 제9차 인체치수 조사 사업에서 장애 유형을 다양화하고 조사 범위도 확대할 예정이다. 다만, 인체치수 조사 사업을 통해 확보된 장애인 인체 데이터를 다양한 제품과 시설물의 제작에 실제로 반영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장애인단체와 관련 산업계의 긴밀한 협력도 중요하지만, 전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가 필수적이다. 아무쪼록 장애인 인체치수 조사 사업이 국민이 장애인의 불편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대자 국가기술표준원장 daeja@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