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튀르키예 FTA, ‘원산지 덫’에 갇힌 K-섬유 고사 위기

2025-11-07

(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한국 섬유 수출기업들이 튀르키예(터키)발 통상 압박에 신음하고 있다.

한-튀르키예 자유무역협정(FTA)이 관세 철폐의 약속 대신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원산지 덫’으로 변모하며 K-섬유 수출 전선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세청의 최근 자료를 조세금융신문이 분석한 결과, 2025년 상반기(1~6월) FTA 협정 상대국으로부터 접수된 한국 수출 물품의 원산지 검증 요청(업체 수 기준)은 총 215건으로, 전년 동기(127건) 대비 69.3% 급증했다.

이 가운데 튀르키예로부터의 요청은 166건으로 전체의 77.2%를 차지했으며, 증가율은 무려 140.6%에 달했다. 2024년에도 튀르키예는 전체 FTA 검증 요청의 약 73%를 차지해 섬유류(직물·편물)에 대한 표적 검증이 고착화된 상태였다.

FTA를 무력화시키는 수준의 반복적이고 강도 높은 검증 공세는 영세한 중소기업 위주의 섬유 산업에 보증금 압박, 행정력 마비, 거래처 이탈이라는 삼중고를 안기고 있다.

◇ 140% 폭증 뒤에 숨은 ‘자국 산업 보호’ 의도

튀르키예가 FTA 검증을 집중하는 핵심에는 섬유 제품에 적용되는 까다로운 ‘얀 포워드(Yarn Forward·실부터의 생산)’ 기준이 있다.

이는 튀르키예가 자국 내 원사-편직-염색으로 이어지는 섬유 공급망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튀르키예에 이어 중국으로부터의 검증 요청 건수도 2025년 상반기 7건으로 전년 동기(1건) 대비 600% 폭증하는 등, FTA 원산지 규제가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는 글로벌 통상 트렌드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24년 1월 튀르키예 무역부는 HS Code 60(메리야스 편물과 뜨개질 편물) 품목을 대상으로 세이프가드 조사를 공식 개시했다.

제소 측인 튀르키예 수출협회 등은 “수입산 제품 물량이 늘어나 국내 기업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튀르키예의 니트류 최대 수입국은 중국과 한국으로, 특히 중국산은 2023년 역대 최고 수입량(5만 3,158톤)을 기록하며 국내 산업 보호의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 튀르키예는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우리나라 수출기업에 잇따라 원산지 인증 검증 절차를 요구해 왔다.

◇ ‘관세 차액 3배 벌금’과 블랙리스트의 공포

튀르키예의 압박이 치명적인 이유는 단순히 원산지 특혜 배제(관세 부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튀르키예 관세법 제234조에 따르면, 원산지 검증 실패로 수입 물품의 관세 차액이 5% 이상 발생할 경우, 수입자에게 관세 차액의 3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수출기업의 단순 행정 실수가 튀르키예 바이어에게 ‘벌금 폭탄’으로 이어져, 한국산 제품과의 거래 자체를 꺼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 당국은 검증 이력이 있는 업체에 대해 반복적으로 검증을 요청하는 경향이 강해, 한 번 원산지 이슈가 발생한 기업은 사실상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속적인 수출 위협에 노출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 K-섬유의 3대 고충…FTA 활용의 걸림돌

한국섬유산업협회 FTA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한국 섬유 수출기업들이 겪는 FTA 활용상의 어려움은 구조적이다. 섬유산업의 원산지 기준은 다른 산업보다 복잡하고 엄격하며, 특히 ‘얀 포워드’는 실(원사)의 생산 단계부터 역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요구한다.

수출업체 A사는 역외산 편물을 수입해 단순 날염만 거쳤으나, 편물 제품은 ‘역내산 실’을 사용해야 한다는 기준에 미달해 적발됐다.

또 다른 수출업체 C사는 역외산 원사(HS5402)를 수입해 합사 등 후가공을 했음에도 원산지 결정 기준(생사 또는 화학 재료부터 생산)을 충족하지 못해 한국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섬유·패션산업은 글로벌 분업 생산과 단납기(Quick Response) 상품이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FTA 원산지 기준 충족 여부 확인, 역내산 원재료 사용 및 공정 기록 확보가 생산의 유동성과 시의성에 밀려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

또한 국내 원부자재를 해외에서 제조한 뒤 재수입하는 ‘수출용 원재료 관세환급대상’ 물품도 FTA 원산지 검증 시 관세 환급 대상 여부를 엄격히 검증받는다. 일부 기업들은 원산지 관리를 “거래처가 알아서 할 일” 혹은 “대표·관리자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등 안일한 인식을 갖고 있다.

FTA 수출 조건 확인(품목 분류, 원산지 규정 해석, 증빙서류 발급)에 대한 책임은 결국 기업 자신에게 있음에도, 세관이나 관세사에게만 의존하는 태도는 검증 실패 리스크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 서울세관의 맞춤형 방패와 FTA의 전략적 활용

튀르키예발 쓰나미를 극복하고 FTA를 실질적인 전략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인식 전환과 정부의 강력한 지원책이 병행돼야 한다.

서울본부세관은 원단 제조·수출기업 등 검증 요청이 잦은 섬유기업을 직접 방문해 FTA 활용 전 과정에 대한 맞춤형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튀르키예 수출 시 유의사항 안내문을 배포하고, 검증 과정에서 확인된 주요 위반 사례(단순 가공 불인정 등)를 공유해 기업의 사전 관리 역량을 높이고 있다. 또한 공익 관세사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무료로 관세행정 컨설팅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원산지 검증으로 인한 불편함을 겪는 기업들은 관세청 FTA포털에서 검증대응 컨설팅 지원사업을 신청할 수 있다.

서울세관 관계자는 “튀르키예 당국에 원산지 인증 수출자 등에 대한 제출 서류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반복 검증 자제도 통상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요청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섬유산업협회 역시 “FTA는 단순한 세금 감면 수단이 아니라 바이어 신뢰를 높이고 시장 접근성을 여는 전략 도구”라며 “기업은 ‘이건 내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버리고, FTA 교육·세미나(연 6회 이상) 참여와 자문 관세사 상담, 활용 매뉴얼을 통해 원산지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원산지 관리 시스템을 글로벌 공급망 관리 차원으로 전환하고, 원사 구매 단계부터 역내산 원재료 사용 여부를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투명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FTA가 한국 기업의 실질적 경쟁력 확보 수단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통상 외교와 기업의 철저한 준법 경영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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