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서부지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청사 뒤쪽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지요. 바로 효창공원입니다.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지요. 일제 강점기 왕실 무덤은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대신 골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효창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추모 시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김구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도 모셔져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묘역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바로 ‘삼의사묘’입니다. 삼의사(三義士)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을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당시 저는 윤봉길, 이봉창 두 분은 알았지만 백정기 의사는 잘 몰랐습니다. 설명판에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월 5일 순국하였다.”
당시만 해도 저는 ‘무정부주의자 운동’라던가 ‘일본 공사 습격 사건’ 같은 내용들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이회영, 박열, 백정기 선생 같은 분들이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2년 정읍시 영원면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지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19세 때인 1914년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계속 무장 투쟁의 길을 걸었지요. 1924년 일본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 시도, 같은 해 일본 천황 암살 시도, 1932년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 1933년 홍커우 아리요시 일본 공사 습격 시도 등이 그것입니다.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는 윤봉길 의사가 성공했던 바로 그 사건과 같은 사건입니다. 당시 백 의사도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을 노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에 ‘삼의사묘’가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6년 일본에서 순국하신 세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46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세 분을 효창원으로 모신 것이지요. ‘삼의사묘’ 옆에는 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묘이지요. 하지만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는 가묘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주기 바라오.’
백 의사의 유언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이 의사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덕분에 자주 독립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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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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