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려인마을, '고려인한글문학 기획전' 강태수 시인

2025-03-19

[전남인터넷신문]광주고려인마을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지난 1일부터 고려인문화관에서 개최 중인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이 많은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고려인 문학이 품고 있는 가슴 아픈 역사와 함께 잊혀진 시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재조명한다.그 가운데, 포석 조명희 선생의 제자였던 강태수 시인(1909-2001)의 사연과 작품이 특히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19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강태수 시인은 1937년 공산당 스탈린 정권의 극악한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재건된 고려사범대 조선어문학과에서 수학하며 문학적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가 쓴 한 편의 서정시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뀌고 말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밭갈던 아씨야’ 라는 시가 학교 벽보신문에 게재된 직후,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는 고려인의 마음의 고향 '연해주(원동)'를 그리워하는 순수한 서정시였지만, 당시 소련 내 극심한 검열과 공포정치 속에서 특정 문구들이 불온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결국 강태수 시인은 연해주를 동경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그는 무려 21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과 거주지 이주 제한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고려인 지식인 사회에서는 ‘조국’이나 ‘원동(연해주)’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조국’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쏘비에트 조국’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던 억압의 시간. 강태수 시인의 시는 고려인들에게 닥친 숨막히는 계절의 전조였고, 자유와 표현의 상실을 알리는 비극적 신호탄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강태수 시인의 시 ‘밭갈던 아씨야’의 전문도 함께 공개돼, 관람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강태수 시인 ‘밭 갈던 아씨야’ 전문 (1938년)은 다음과 같다.

밭 갈던 아씨야!/ 이 가없는 벌판에/ 땅거미 살며시 기여들어/ 모드를 거무슥 물들일 즈음/ 나는 차장에 목을 내밀고/ 네가 갈던 밭과/ 내가 뜨라또르(트렉터)에서 내려/ 기꺼이 걸어가던 그 모습/ 다시 한번 보구지여라/

내가 이렇게 차창가에 기대여/ 속 타는 그리움에 시달리는 중/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너는 아마 잠 이루지 못하고/ 비인 머리맡에 눈을 던지면서/ 말 못하는 베게나 못살게 구느냐?/ 너는 문을 열지 말어라/ 사랑하는 사람에겐/ 따로 문이 없다/

이 하늘 같은 벌판을/ 갈아 번지는 내 몸을/ 이빨이 억센 바람은/ 몇 천 번 물어뜯었으며/ 굿은 빗발은 몇 만번/ 내 옷을 적시었느냐?/ 아씨야. 언제야 밭머리에 서서/ 팔 소매 걷어올리는 사랑에/ 너는 무엇을 선보이려나?/

나는 어저게 처녀림 속에서/ 아침 추위에도 땀 흘리며/ 나무 베이는 사람들 보았다/ 저 사람 드문 골짜기에서/ 철길이 상할가 한 가래 두 가래/ 흙을 파 올리던 그 늙은이/ 그야말로 순실 그것이었다/ 그런데 내 몸과 마음 왜 헐 값이라/ 밭 갈던 아씨야/ 너는 내게 뭘 충고 하려나?/

큰 마음먹고 이 몸이 바라건데/ 내 브리가다에 들어서/ 너와 함께 손 잡고 몸 받쳐/ 이 벌판 죄다 갈아 번지고/ 솜씨있게 씨앗 뿌리고/ 알뜰히 가꾸고 가꾸어/ 북 치며 풍년놀이 하려는데/ 사랑아, 잊지 못할 내 아씨야,/ 너는 네게 무엇을 가르치려느냐?/

한밤의 벌판에 외로운 기적소리,/ 지금 나는 너를 찾아가느냐/ 너를 두고 떠나가느냐?/ 우리 마을 뒷산은 보이지 않는다/ 밝는 날은 어제일가 그제일가/ 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에 떨어지며/ 마음은 너를 찾아 달음박질,/ 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 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우리는…

광주고려인마을 관계자는 “고려인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민족의 혼이자 기록”이라며, “이번 기획전을 통해 많은 분들이 잊혀진 고려인들의 아픔과 끈질긴 생존 의지를 되새겼으면 한다”고 전했다.

고려방송: 안엘레나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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