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커 맨’이 나타나면 내가 믿던 세계가 무너진다

2024-12-25

위커 맨

감독 로빈 하디

배우 에드워드 우드워드, 크리스토퍼 리, 브릿 엑클랜드

상영시간 88분

제작연도 1973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위커 맨’이란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거대한 허수아비다. 고대 로마의 전쟁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은 <갈리아 원정기>에 따르면 고대 영국 켈트 족의 사제인 드루이드는 위커 맨 속에 죄인이나 포로를 가두고 불을 질러 신에게 인신공양(人身供養)을 했다. 현대 미국과 유럽 곳곳에선 이런 고대 종교를 되살리려는 ‘신이교주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로빈 하디 감독의 영화 <위커 맨>(1973)은 신이교주의 공동체를 다루는 ‘포크 호러’의 고전이다.

영국 경찰관 ‘하위’(에드워드 우드워드)는 열두 살 소녀가 실종됐다는 제보를 받고 서머아일 섬으로 향한다. 하위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남근상을 숭배하거나 벌거벗은 채 춤을 추고, 어른들이 들판에서 공공연하게 섹스하는 모습에 기겁한다. 영주 ‘서머아일 경’(크리스토퍼 리)에 따르면 서머아일 섬은 과거 사과 흉작이 계속되자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고대 원시 종교로 회귀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하위는 서머아일 섬의 문화를 참을 수가 없다. 하위는 수사 끝에 서머아일 섬에선 흉년이 들면 제물을 바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실종된 소녀가 ‘5월 축제’에서 제물이 되리라 확신하고 소녀를 구하러 나선다.

‘포크 호러’는 외부 세계와 단절돼 그들만의 민속 문화를 믿는 공동체의 광기를 보여주는 장르다. 핵심은 불가사의한 세계에 내던져진 자의 막막한 공포감이다. <위커 맨>이 특별한 이유는 밝고 환한 호러 영화이기 때문이다. 햇볕이 쨍쨍한 곳에서 피를 보여주지 않고서도 무섭게 만들 수 있다. 영국 전통 민요를 변주한 포크 음악들은 맛과 향을 더해주는 양념 격이다. 마치 뮤지컬 영화처럼 주민들이 술을 마시며 떠드는 장면, 서머아일 경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축제 연습을 하는 장면 등에선 노래가 빠지지 않는다. 나는 <위커 맨>이 수십 년 뒤 아리 애스터 감독의 명작 <미드소마>(2019)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 확신한다.

<위커 맨>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경찰관이 폐쇄 공동체의 비밀을 파헤치는 추리극 형식이다. 하위는 열심히 수사하지만 주민들은 하나같이 실종된 소녀를 모른다고 대답한다. 대신 명랑한 웃음, 노래, 춤으로 하위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하위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금지된 것들로 가득한 서머아일 섬에 맹렬한 적대감과 동시에 매혹감을 느낀다. 여관방으로 허겁지겁 도망친 하위는 아랫층의 몽롱한 노래를 들으며 옆방에서 알몸으로 춤추는 여관 주인 딸 ‘윌로우’(브릿 엑클랜드)에 대한 욕망을 힘겹게 견뎌낸다. 하위는 자신이 서머아일의 비밀을 쫓는다고 믿지만 사실 쫓기는 쪽이다.

하위는 기독교 신념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보수적이고 독선적이다. 서머아일 섬을 돌아다니며 수사하는 태도는 무례를 넘어 폭력에 가깝다. 하위가 서머아일 경과 만나 논쟁하는 장면은 두 종교, 두 믿음, 두 세계가 정면 충돌하는 순간이다. 이때 <위커 맨>은 하위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교도’를 혐오하는 관객을 향해 ‘불경하게’ 도전한다. 서머아일 경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섬의 종교관을 설명한다. 하위는 격노하며 반박하지만 어린아이 쌩떼처럼 논리가 부실하다. 마침내 위커 맨이 나타날 때 하위는 서머아일 섬에서 ‘이교도’로 전락하고 기독교 세계는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무너진다.

서머아일 경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배우 크리스토퍼 리 덕분에 가능했다. 후리후리한 키와 묵직한 발성은 독보적이다. 흡혈귀 백작 ‘드라큘라’부터 절대반지를 찾는 어둠의 군주 ‘사우론’까지 수많은 악역으로 등장해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위커 맨>에서 노을을 마주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장면에서 끓어오르는 원초적 에너지는 흔치 않은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서머아일 경’을 자신이 맡은 배역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배역 중 하나로 여긴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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