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삶과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사고방식이나 일하는 방식 등을 변화시켜 생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AI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 각국은 5차 산업혁명이라고도 불리는 A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그 기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를 활발히 하고 있다. 미국, 중국을 선두로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중점적으로 데이터센터에 대해 투자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이 떠오르는 시장으로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를 활발히 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AI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새로운 정부에서 데이터센터를 비롯한 AI 전반에 대한 활발한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투자가 발생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르는 현실이다.
◇데이터센터 대표 규제, 전력계통영향평가
현재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하는 사항은 건축 관계 법령에 따른 부대설비 설치 의무에 대한 규제, 정보통신 관계 법령에 따른 데이터센터 안정성(시설보안, 관리 인력 운영, 재난 대비 등을 포함) 규제와 전기 관계 법령에 따른 전력공급 규제 등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제기되는 전자파 유해성, 소음 등을 우려하는 민원이 데이터센터의 구축에 있어 실질적인 장애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민원 및 비용 상승으로 송배전 시설 구축이 어려워짐에 따라 전력 수급지역의 불균형과 수도권 전력망 포화가 눈앞에 다가온 현시점에서 정부는 강력한 전력공급 규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단일 건물 기준 대규모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이므로 정부에서는 데이터센터를 전력공급 규제의 대표적인 적용 대상으로 규정한 상황이다.
정부의 전력공급 규제 중에서도 지난해 새롭게 도입된 전력계통영향평가는 데이터센터 신규 구축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규제로 작용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국내외 AI 및 데이터센터 관련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외면하고 다른 아시아권 국가로 눈길을 돌리는 코리아패싱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전력계통영향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형적 중복규제, 전력계통영향평가
전력계통영향평가는 2024년 시행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하 분산에너지법)에 따라 전력수요의 지방분산 및 전력계통망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도입된 제도다. 현재 전력계통영향평가의 근거법인 분산에너지법 및 하위 법령(시행령, 시행규칙) 까지는 제정됐으나 전력계통영향평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기준 및 절차를 규정하는 관련 고시는 현재까지도 제정되지 못해 시행이 유보된 상황이다.
전력계통영향평가 제도 도입 이전에 산업부는 2023년 전기사업법령(시행령 제5조의 5) 개정을 통해 전기사업자가 전력공급을 거부할 수 있는 제도를 이미 시행 중이었다. 전기사업법령에 따른 전기사업자의 거부권 행사 기준도 전기의 품질 유지와 전력 계통의 신뢰도 유지 등 전력계통영향평가의 목적과 다르지 않았다. 즉, 전력계통영향평가 제도 도입의 목적 중 전력계통망의 안정성 확보는 이미 전기사업법령을 통해서도 달성할 수 있었으므로 전력계통영향평가는 전형적인 중복규제에 해당한다.
기존 제도로도 충분히 전력 수급을 조정할 수 있었음에도 전력계통영향평가라는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려면 규제 도입을 이해할 만한 공익적 목적이 제시돼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규제 도입의 정당성에 대해 데이터센터 산업계를 설득하지 못한 상황이다.
물건을 판매하려는 자가 구매자에게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비용을 들여 물건을 구매할 자격을 갖추었는지 입증하라는 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수요 신청 시 전기공급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전기사업법령에 따라 공급을 거부하면 되는 것 아닌가?
◇평가 대상 지역과 평가 기준도 문제
전력수요의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일반인의 상식상 수도권 지역에 규제를 적용하고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전력계통영향평가의 대상 지역을 전국으로 지정해 오히려 전력수요 분산 유인을 약화시켰다. 정부 스스로가 제도 도입의 정당성을 부인한 모순을 범한 것이다.
전력공급 여유, 전력공급 여유 확보 난이도, 적정전압 유지 가능 여부, 전력공급 영향 최소화 방안, 적정전압 신청 여부 등의 기술적 판단기준과 전력 자립도, 전력 정책 부합도, 전력수요 분산화 효과 등의 정책적 판단기준은 전력 공급자에게서 살펴봐야 할 사항이므로 전력 수요자에게 이러한 판단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또 비기술적 평가항목으로 전력수요를 신청하는 자에게 사업 안정성, 지방재정 기여도, 산업 활성화 효과, 해당 지역 지원사업 등을 전력 공급자가 점검하겠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항이 타당성을 가진다 해도 이런 사항은 해당 정부 기관에서나 점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전력계통영향평가, 폐지 수순으로 가야
AI 시대를 출발하기도 전에 전력계통영향평가라는 진입장벽이 AI 산업의 기반 시설인 데이터센터 구축에 심각한 장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데이터센터 투자 유치를 위해 규제를 간소화하고 각종 정책적 지원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규제를 강화해 글로벌 사업자의 데이터센터를 포함한 AI 투자에서 코리아패싱 현상까지 일어나는 현실이다.
AI 산업에 대한 해외 투자를 유치하면서 동시에 전력 수급의 지역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규제 일변도의 정책 대신에 오히려 비수도권 지역 대상 투자자에 대한 전력 요금 인하 등 적극적인 인센티브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다.
어떠한 산업이든 기본적인 설비투자 없이 발전하는 산업은 없다. 철강 제조 기술을 연구한다고 해서 제철소 없이 철강이라는 제품이 생산될 수 없듯이 데이터센터라는 기반 시설 없이는 정부가 아무리 AI 기술 개발에 막대한 R&D 투자를 할지라도 AI 서비스가 상용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이 AI 산업의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력계통영향평가와 같은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폐지하는 한편, 데이터센터 산업법 제정 등 데이터센터 산업의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는 다양한 진흥책이 추진돼야 할 때다.
강중협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 회장 batkjh@kdcc.or.kr
〈필자〉강중협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장은 행정안전부 정부통합전산센터(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센터장을 비롯해 정보화전략실장을 역임하는 등 공공 정보기술(IT) 발전 한 축을 이끌며 헌신해 왔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장 취임 후 데이터센터 산업계 의견을 국회·정부 등에 전하며 산업 발전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