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부라쿠민’, 차별의 한가운데…삶은 피고 지고

2026-01-01

천년의 즐거움

나카가미 겐지 지음 | 이정미 옮김

문학과지성사 | 307쪽 | 1만7000원

새벽녘, 오류노 오바는 집 뒷문으로 숨통을 막을 것처럼 달콤한 여름부용의 향기를 맡는다. 피차별 부락 ‘로지’의 유일한 산파인 노년의 여성은 여름부용의 향을 맡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새소리, 다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오류노 오바는 그 소리가 나카모토 집안 남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미남이었던 한조가 기르던 덴코라는 섬휘파람새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소설은 로지에서 나고 자란 나카모토 집안 남자들의 짧은 생애를 그린다. 오류노 오바는 그들의 태어남과 죽음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 속 화자와 같은 인물이다. 첫 시작은 한조다. 어린 시절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고 마을 어른들에 의해 키워진 그는 아름다운 외모로 여성들의 관심을 받는다. 한조는 여성 편력에 빠져 평생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다니다 스물다섯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피차별 부락 출신과 아름다운 외모라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던 것들로 평생 환멸을 느꼈으나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부라쿠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피차별 부락이란 에도 시대(1603~1867)에 천민들이 거주했던 마을 또는 지역을 가리킨다.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천민 제도를 폐지했으나 사회적인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차별 부락 출신으로 알려지면 결혼이나 취업 등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일도 있다. 최근에도 SNS 등에 피차별 부락민에 대한 차별적 글이 올라와 일본에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피차별 부락 출신 작가의 소설집

내부자 시선으로 바라본 부락민

버림받고 설 자리 잃는 이들의 삶

일본의 마술적 사실주의 대표작

<천년의 즐거움>은 일본에서 드물게 피차별 부락 출신임을 공개하고 문학 활동을 했던 나카가미 겐지의 연작 소설집이다. 작가는 1946년 일본 간사이 남부 와카야마현 신구시의 피차별 부락, 일명 ‘로지’에서 한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재가, 어린 이부형의 죽음 등 복잡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로 옮겨가 동인 작가로 활동하며 좌익 정치 운동에도 참여했다. 1976년 개인사를 반영한 중편소설 <곶>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스스로를 “피차별 부락이 문자를 만나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로 일컬으며 피차별 부락을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부의 언어로 말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서울 영등포를 비롯해 뉴욕의 할렘, 마닐라의 스모키 마운틴, 브라질 빈민가, 유럽 게토 등 여러 지역에서 ‘로지’와 닮은 공간을 발견하고 글에 담았다. 서울을 무대로 한 소설 <이야기 서울>, 에세이 <윤무를 추는, 서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승원 작가를 비롯해 한국 문인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딸인 나카가미 노리 역시 대를 이어 한강 작가와 교류하는 등 한국과 인연이 깊다. 작가는 1992년 신장암으로 46세에 생을 마감했다.

소설 속에서 불행의 서막이 되는 복잡한 가족 관계는 부모라는 개념이 일반 사회처럼 뚜렷하지 않았던 현실의 피차별 부락 모습을 그대로 옮겨온다. 사회적 차별과 부락의 특이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나카모토 집안의 남자들은 여성 편력을 비롯해 도둑질과 살인, 이상 세계에 대한 몽상 등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어딘가에서 빗나간 듯한 삶을 사는 인물들이다.

두 번째 단편 ‘육도의 갈림길’에는 한조의 삼촌이나 나이는 어린 미요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불량 소년들을 이끌며 대장 노릇을 통해 돈을 벌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징집되었던 어른들이 돌아오면서 자리를 잃는다. 이후 미요시는 히로뽕에 손을 대고 범죄를 저지르다 죽는다. 비극적인 죽음은 나카모토 핏줄의 천형처럼 보인다.

다만 로지를 비롯해 나카모토 집안의 남자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태도는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나카가미가 상상으로 그려낸 가공의 꽃 여름부용의 아름다운 향기로 시작하는 소설은 그 자체로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년의 즐거움>은 작가의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 책을 옮긴 이정미에 따르면 일본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제목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패러디로, 작가는 생전 “마르케스가 백 년이면 나는 천 년이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