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나 모텔, 아파트 등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방화 범죄가 이어지고 있으나 법원에서 유기징역을 선고한 사례는 약 3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의적으로 불을 내는 방화 범죄는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크게 위협하는 중대 범죄로 꼽힌다. 하지만 실제 50~60%가량은 집행유예·벌금형에 처해지는 등 ‘솜방망이 처벌’에 머물고 있다. 최근 영남 지역을 휩쓴 ‘괴물 산불’도 성묘객 실수 등에서 비롯된 가운데 방화·실화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3년 방화·실화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은 351명으로 전체(679명)의 49.09%에 달했다. 이어 74명(10.34%)에게는 벌금형이 선고됐다. 반면 유기징역이 선고된 건 198명으로 27.69%에 불과했다. 2021년과 2022년에도 유기징역에 처해진 것은 20~30% 수준이었으나 집행유예는 50% 가까이 육박했다. 또 10건 가운데 한 건은 벌금형이었다. 대규모 재산·인명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10명 중 6명가량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처해진 셈이다. 서울경제신문이 지난해 방화 혐의 1심 판결문 100건을 전수 분석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 선고 가운데 유기징역은 21건뿐으로 집행유예는 75건에 달했다. 벌금형은 2건으로 형의 면제·선고유예가 각 1건이었다. 실제로 경기도 한 병원에서 방화를 시도한 A씨에 대해 법원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 씨가 비닐과 라이터를 이용, 방화를 시도했다. 다행히 초기에 진화해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법원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다수 입원해 있어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며 A 씨를 질책했다. 하지만 범행이 미수에 그쳤고 섬망 증상과 알코올성 금단증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는 대전 지역 본인 소유 모텔에서 객실에 불을 지른 B씨도 마찬가지였다. 법원은 B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화재가 조기에 진화가 되면서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방화 당시 15명이 장기 투숙해 자칫 무고한 생명을 앗아갈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B씨는 범행 직후 별다른 조치도 없이 현장을 이탈했으나 법원 처벌은 집행유예에 그쳤다. 고의로 불을 내 대규모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방화 범죄를 저질렀으나, 처벌 수위는 법정형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형법상 실수로 불을 내는 실화죄의 경우 1500만 원 이하에 벌금에 처한다. 업무상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인 경우에는 3년 이하의 금고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번 영남 산불 발화자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반면 방화의 경우 유기징역이 법정형으로 정해져 있다. 형법에 따르면 사람이 살거나 쓰고 있는 건물이나 기차·자동차·선박·항공기 등에 불을 지른 피고인은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 일반 물건에 방화를 해도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양형 기준도 피해 정도나 범행 동기, 계획 범죄 등 여부에 따라 최대 7년형까지 법원에서 선고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문가들은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방화 범죄에 대해 법원이 고의·계획·위험성 등을 따져서 엄벌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초범·반성 등 감형 사유가 있더라도 사전 계획에 따라 고의로 남을 해하기 위해 불을 냈을 시에는 중형으로 처벌해야 재범 자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대규모 인원이 거주하는 아파트나 다가구주택, 병원, 모텔 등이라면 향후 위험성을 따져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아파트나 다중 주거 시설, 병원 호텔 등 다수가 운집한 장소, 즉 인명 피해가 발생할 위험 범위가 넓은 방화 범죄는 다수의 인명·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다”며 “현재 법정형이 높게 책정돼 있는 만큼 다수의 인명을 겨냥한 방화죄에 대해서는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방화 범죄의 가장 큰 위험은 내재하고 있는 공격성을 표출한다는 점”이라며 “때문에 사전에 범죄를 계획했는지, 고의성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처벌의 수위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