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도 빛나는 오지호의 ‘남향집’

2025-03-25

대추나무엔 잎이 하나도 없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에 백구는 잠이 들었다. 빨간 원피스 입은 아이는 외투 없이 문밖을 나서려는 참이다. 오른쪽 아래 ‘一九三九年 之湖’라고 서명했다. 추위가 미적거리는 요맘때 생각나는 오지호(1905~82)의 ‘남향집’(사진)이다.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한가운데의 그림자. 노란 초가집과 황토벽에 나무가 청보랏빛 긴 그림자를 늘어뜨릴 때 오지호는 붓을 들었다. 첫 전시 때 붙인 제목이 ‘사양(斜陽)’, 해 질 녘의 빛이다.

도쿄미술학교 유학 시절 오지호는 외광파(外光派) 양식을 익혔다. 일본의 흐리고 습한 대기와 만난 절충형 인상주의다. 1935년 개성 송도고보 미술 교사로 부임한 뒤 야외로 나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사생했다. 그림 속 초가는 이때 살던 집이다.

화가 사후 아내는 ‘남향집’을 비롯한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남향집’은 2013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인상주의를 토착화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 달 말부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된다. 마침 오지호 탄생 120주년이다.

그림자마저 환하다 해서 그의 삶이 환희로 가득했던 건 아니다. 따뜻한 봄날 풍광 같아 뵈지만, ‘남향집’은 겨울 초입에 그렸다. 하지만 메마른 초겨울 그늘에도 빛이 있고 색이 있다. 작가는 봄을 기다리며 그 빛을 좇았다. 그림을 보는 오늘 우리도 비슷한 심정일 게다. 참 모질고 긴 겨울이었다. 이제 그만,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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