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과학기술혁신펀드 출범에 즈음해

1980년대 한국에 도입된 8비트짜리 애플Ⅱ 컴퓨터는 탁월한 그래픽 처리 능력으로 전자오락을 집에서 즐기게 했다. 고가 외장형 메모리 장치 구입이 어려워 소프트웨어(SW)를 카세트테이프에 저장하는 추억도 덤으로 제공했다. 그렇게 PC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준 애플은 갖은 시련과 도전 끝에 아이폰 개발에 성공해 세계를 제패했다. 성장단계별로 애플이 벤처캐피털(VC)로부터 적절한 투자를 받지 못했다면 오늘날 애플 신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이 지금도 세계 경제를 호령하는 이유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VC에서 근무하는 필자로서는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모험기업과 창의자본의 협력 모델에서 그 힘의 원천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VC 효시는 1974년의 한국기술진흥금융(K-TAC)이라는 회사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연구성과를 사업화하기 위해 설립됐지만,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설립된 한국기술개발(현 우리벤처파트너스)과 한국기술금융(현 산은캐피탈) 양 사가 초기 VC 시장을 양분했다. 당시 벤처기업 기술 수준은 지금과 달리 상당히 낮아 VC 성장도 한계가 있었다.

현재는 벤처기업 기술 수준이 높아진 정도를 넘어 바야흐로 딥테크를 중심으로 한 기술 전쟁 시대가 도래했다. 인공지능(AI)과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엔비디아는 돌풍을 일으키며 한때 애플 시가총액을 역전하기도 했다. 애플과 엔비디아는 두 회사 시가총액 합이 나스닥 전체 시가총액 대비 약 14%대를 형성하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두 기업은 모두 아주 작은 벤처기업에 불과했으나 VC 투자를 거쳐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기술 주권 중요성이 커진 시기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민간과 협력해 약 1조원 이상 과학기술혁신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한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이 펀드는 12대 국가전략기술에 집중 투자하는 민관 협력형 모태펀드로, 글로벌 기술 전쟁 시대를 주도할 힘을 제공할 것이다.

모태펀드 조성 계획과 함께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 육성 계획도 발표됐다.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는 연구소에서 개발된 초기 기술을 발굴해 투자하고 육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VC도 발굴, 투자, 육성 역할을 일부 할 수 있겠으나, 연구소의 수준 높은 미래 핵심 기술은 사업화 단계 극초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KIST,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22개 국책 연구소는 세계적인 기술 수준을 자랑한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민간과 합작해 세운 콜마BNH는 제1호 연구소기업으로 코스닥에 상장해 한때 시가총액 2조원을 넘는 등 사업성 측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수준 높은 국책 연구소 기술을 전담해 사업화하는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가 출범한다면 더 밝은 대한민국을 꿈꾸게 해줄 것이다.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와 VC 업계의 상호 협력 및 선순환 구도 또한 VC 생태계에 큰 파급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국책 연구소에서 개발된 혁신적인 극초기 기술을 사업화하는 기업에 대한 전문화된 초기 지원 및 육성시스템이 형성된다는 이유에서다. 개발된 기술이 단순 논문이나 특허로 머물지 않고,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 투자로 사업화로 연결되는 체계적 지원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VC 투자 연계로 이어달리기 모델이 확립돼 딥테크 기업 추가 성장도 기대된다.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 투자를 받아 성장하고 있는 비즈니스 검증이 용이해 VC에 의한 후속 투자가 촉진될 수 있다.

기술 패권 시대 전략적 가치도 제고될 것이다. 첨단 기술 조기 상용화로 국가 경쟁력이 강화되며 국가 차원의 기술 패권 확보가 가능하다.

딥테크가 국력인 시대에 민관 협력의 과학기술혁신펀드와 기술사업화 종합전문회사 출범 계획을 환영하며, 이를 통해 미래 세대가 K컬처에 이은 K테크로 전 세계를 주름잡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서학수 더웰스인베스트먼트 대표 hssuh@investwel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