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세 권의 책 얘기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첫 번째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의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이다. 기술 발전과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 세계의 경쟁 무대가 평등해졌다는, 이제 와 생각하면 동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프리드먼의 글솜씨는 뛰어나지만 이 책은 민족주의나 극단주의, 보호무역주의 등의 가능성을 무시했거나 적어도 과소평가했다. 한땐 모든 사람들이 이 책 얘길 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 정독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책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자유무역이라는 환상(No Trade Is Free)’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역임한 그는 최근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2기 관세전쟁의 저작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라이트하이저는 이 책에서 1990년대 이후의 자유무역 정책이 정작 수백만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없애고 무역적자를 폭증시켰다고 본다. 트럼프가 특유의 다혈질적 기질로 기분에 따라 알 수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관세론자들의 논리는 생각보다 매우 탄탄하며, 이 흐름은 결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책은 미국에서도 나온 지가 얼마 안 돼서 한국어 번역 제목이 없다. 팔란티어(Palantir) CEO 알렉스 카프가 쓴 “The Technological Republic”이라는 책이다. 현재까지 나와 있는 서평에 따르면 카프는 이번 책에서 실리콘 밸리에 존재하는 테크 기업들이 본래의 사명에서 벗어나 플랫폼 장사에만 집중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미국의 가치와 안보 보호를 위한 기술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애국심’의 회복을 강조한다.

세 권의 책은 지난 20여년간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이 언제까지나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세계를 관리하는 ‘너그러운 패권국’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통념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의해 잘근잘근 분쇄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이 제공해온 수많은 편익들은 사실 의무 사항이 아니었고, 이제 세계 각국은 미국에 어떤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새롭게 정의된다. 영단어 good은 ‘좋다’는 의미 외에 ‘착하다’는 뜻도 있는데, 지금 상황이 꼭 그렇다. 미국에 좋은 것이 착한 것, 이로운 것이며 미국에 뭔가를 제공할 수 없다면 더 이상은 함께 갈 수 없다.
이제 취임 한 달 남짓이 된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1기보다 한 층 더 거칠게 다가온다. 트럼프로선 거리낄 게 없을 만도 하다. 지금은 그 어떤 충격도 전임 바이든 행정부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골든 타임’이기 때문이다. 스콧 베센트 재무부장관 역시 현재의 관심사는 ‘국채금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적어도 지금 현재로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제1 목적이 주가 부양은 아닌 듯하며, 이렇게 보면 하루하루 주가가 요동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투자자 관점에선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나눠서 볼 필요가 있겠다. 대공황 이후부터 거의 70여년간 상승해온 미국 증시는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불확실성도 넉넉히 흡수하면서 올라온 불굴의 시장이다. 하물며 눈에 보이는 ‘간판’을 중시하는 트럼프가 주가를 박살낸 채로 자신의 마지막 임기를 끝낼 것으로 생각되진 않는다. 언젠가 그는 다시 주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결국 미 증시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길게 보면 매수의 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단, 레버리지를 활용한 공격적인 투자는 반등 흐름이 명확해졌을 때 사용하는 편이 좋겠다. 밤에 편안히 잠들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실었다면 일반인 레벨에선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투자다.
한국의 경우는 얘기가 좀 더 복잡하다. 우선 우리 증시는 작년 하반기부터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혹독한 '다이어트'를 실시한 상태다. 최근 미국 증시가 빠졌는데도 한국 증시가 견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지난 2월 28일 또 다시 지수가 급락했지만, 그래봐야 더 내려갈 곳도 없다. 여기서 더 떨어져봐야 코스피 전저점인 2400~2450 부근에선 미국이 어떻건 계속 반등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전고점인 2650 부근까지 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지느냐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이슈를 포함해 공매도 재개, 상법 개정 등 굵직한 재료가 너무 많다. 미국과 달리 한국 시장은 사놓고 묻어둬도 되는 너그러운 증시가 아니다. 따라서 하락 시엔 매수 포지션을 취하되 지수가 상승하면 적당히 물량을 덜어내면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대응하는 전략이 유효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