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를 돌보는 것이 제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게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엄마를 돌보지 않는 저는 어떤 모습의 사람일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9월 필자와 함께 ‘가족돌봄 아동·청소년 지원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한 한 아이가 했던 말이다.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을 돌보는 일이 어린 자신의 일상을 챙기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된 아이들. 우리가 효자, 효녀라 부르며 칭찬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런 아이들이 과연 지금 대한민국 땅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아쉽게도 이 질문에 답하기가 간단하지 않았다. 아동·청소년의 가족돌봄에 대한 법과 제도가 그동안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가족돌봄 아동·청소년 현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시작하게 되는 가족돌봄을 모두 아우르기엔 제한적이었다.
효자·효녀로 당연시할 문제 아냐
국가 책임 명시한 법안 통과 환영
시행령도 사각지대 없도록 해야

지방자치단체마다 조례를 통해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일관된 원칙 없이 지역마다 지원 기준과 범위가 달라 실질적 지원으로 이어지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필자가 속한 초록우산도 2021년부터 아동의 가족돌봄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법제 개선을 촉구하고 현장의 아이들 수천 명을 찾아가 지원해 왔다. 그러나 제도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선 민간단체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분명했다.
반면에 영국은 지난 2014년 ‘아동 및 가족법(The Children and Families Act)’을 토대로 가족돌봄 아동 조사·연구 및 지원을 활발히 펼쳐 왔다. 호주는 2010년 ‘케어러 인정법(Carer Recognition Act)’에 따라 경제적 지원과 함께 정부 차원의 상담 및 정보 제공에 적극적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아동의 가족돌봄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으며, 관련 입법과 제도 개선이 속속 이뤄지고 있다. 이미 아동의 가족돌봄 문제를 중요한 사회문제 중 하나로 인식하고, 민간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달 27일 관련 법안 10개를 통합·조정한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안’의 국회 통과는 환영할 일이다. 대한민국 복지 체계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돌보는 아동·청년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명시한 첫 법안이어서다. 해당 법안은 가족돌봄 등 위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기본계획 및 실태조사, 심리상담, 건강관리, 주거 등 지원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법 제정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전국의 가족돌봄 아동·청소년들에게 나이·거주지와 무관하게 실질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초록우산은 제도 마련을 위해 그동안 가족돌봄 아동·청소년 발굴을 위한 ‘돌봄 약 봉투 캠페인’을 진행하고, 국회 사진전 등을 진행했다.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에 대한 고민부터 법안 마련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준 각계의 참여와 지지가 있었기에 법안 통과가 가능했다.
한국경제 사정이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을 돌보며 사는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으로서 가정의 실질적 보호자 역할을 하는 아이들의 일상은 여전히 가족을 위한 헌신, 효도의 시각에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가족돌봄은 어린 나이에 이뤄지는 ‘돌봄 노동’으로 바라봐야 한다.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도리가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가 돕고 해결해야 하는 아동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군사력 세계 5위, 1인당 국민소득 일본 추월. 모두 기분 좋은 뉴스들이다. 대한민국이 진짜 선진국이 됐다면 힘겨운 가족돌봄을 위해 아이의 성장 기회가 빼앗기는 경우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을 위한 법안은 이런 현실을 타개할 초석이 될 것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에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이 단 한명도 남지 않는 날이 오는 꿈을 꾼다. 법 제정에 힘쓴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시행령 등 하위법령도 정교하게 설계해 사각지대 없는 촘촘한 지원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