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곤’(pentagon·5각형)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한 미국 국방부 청사는 1943년 1월 완공됐다. 미국이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등과 싸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사무용 빌딩답게 무려 2만4000여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한 건물 안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하 2층, 지상 5층 규모에 층마다 5개씩의 복도가 있어 그 길이를 모두 더하면 28㎞에 이른다니 빌딩 전체를 둘러보는 데에만 며칠이 걸릴 지경이다. 이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을 감독한 인물이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자 공병(工兵) 장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중장으로 예편)이다.
그로브스 장군 하면 할리우드 영화 ‘오펜하이머’(2023)에서 명배우 맷 데이먼이 연기한 그 사람부터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이자 명문 UC 버클리 대학교 교수인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가 그로브스 장군과 만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다. 펜타곤 건설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한 그로브스 장군은 건물 완공이 얼마 안 남은 1942년 미군 수뇌부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군인과 과학자들을 조합해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만드는 국책 사업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브스 장군은 행정적 의미의 감독자였고, 그 밑에서 연구·개발 업무를 총괄할 과학자가 바로 오펜하이머 교수였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뉴멕시코주(州) 로스앨러모스에 원자폭탄 설계 및 제조를 위한 시설이 설치됐다. 세계 최초의 원폭 탄생을 위한 사업에는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왜 맨해튼이란 지명을 차용했는지를 두고선 의견이 분분하다. 미 육군 공병단 본부가 뉴욕 맨해튼에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유력하다. 프로젝트 참여를 위해 미국인은 물론 2차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출신 과학자들까지 내로라라는 석학들이 로스앨러모스로 모여들었다. 독일이나 일본 같은 추축국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 아래 미 행정부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물불 안 가리고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었다.
미 연방의회의 초당적 기구인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가 19일 ‘인공지능(AI)판 맨해튼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중국과의 첨단기술 경쟁에서 이기려면 AI 분야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은 대규모 민관 합동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을 AI 연구자들이 휩쓴 것처럼 이제 AI는 한 나라의 과학기술 역량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과물로 탄생한 원자폭탄이 미국의 2차대전 승리를 견인했듯 AI 분야의 선구자가 21세기 세계 경제의 승자가 될 것이다. 여야 정쟁 탓에 AI 기본법조차 만들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한국 국회와 너무나 대비돼 딱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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