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회 분리 선출 확대 등 대주주의 힘을 무력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노리는 투기 자본들이 수시로 경영권 침탈을 시도할 수 있다. 또 이사의 충실 의무가 주주로 확대되면 의사 결정을 제약해 한국식 속도 경영이 종말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여당안대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단기 차익을 노리는 행동주의 헤지펀드들로부터 경영권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전체 상법 개정의 틀이 대주주의 발목을 묶어 놓고 금융자본에는 경영권을 흔들 고속도로를 깔아주게 짜여 있다는 진단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감사위원 분리 선출에 집중 투표제, 3%룰을 합치면 파괴력이 상당하다”며 “취약한 한국 시장을 겨냥해 헤지펀드들이 100조 원 실탄을 마련, 대기업 사냥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적대적 M&A 사례가 한번 나오면 증시 과열로 코스피 지수 5000도 찍을 수 있다는 게 행동주의 펀드의 노림수”라고 덧붙였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의 제도가 강제로 도입된다. 집중투표제는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당 선임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현재도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회사의 의무 사안이다. 정관을 통해 배제할 수 있지만 상법 개정안은 이를 금지한다. 법이 통과되면 주요 주주가 의결권을 분산해 특정 이사에게 몰아주는 방식으로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 실제로 헤지펀드 칼 아이칸이 2006년 KT&G의 이사회에 진출해 회계장부 제출 등을 요구하며 주식 매각과 배당금 등으로 1500억 원에 가까운 차익을 보기도 했다.
감사위원회를 구성할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특수관계인을 포함해 3%로 제한하면서 분리 선출해야 하는 감사위원을 1명에서 위원 전원으로 확대하는 안은 국가 핵심 기술을 유출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다. 주주로 들어온 투기 자본들이 감사위원이 되면 회사의 조사와 감사권, 주총 소집 청구권은 물론 각종 소송을 제기할 권한까지 얻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금융자본들이 회사의 주요 자산을 사고팔 수 있는 이사회는 물론 감사권까지 차지하고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무차별 소송을 통해 경영진을 재판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자산 1조 원 이상 상장사들이 평균 7명의 이사를 두고 이 가운데 4명이 사외이사”라며 “감사위원을 시작으로 집중투표제를 활용해 야금야금 이사회를 장악하면 경영권 탈취는 시간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사업회사보다 저평가되고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지주회사는 더 취약하다"고 덧붙였다.
재계는 특히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규정한 상법 제382조의 3에 회사와 더불어 ‘주주의 이익’을 추가하는 개정안은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액주주의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 법의 취지이지만 오히려 단기 투자로 성과를 내는 행동주의 펀드 같은 금융자본이 주주로 들어와 무차별 소송을 할 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안이 이 조항을 살려서 국회에서 통과되면 세계 산업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한국식 속도 경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수출 1위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가 1983년 최초로 진출을 선언했지만 1987년 첫 흑자를 내기까지 당시 1400억 원 이상 누적 적자를 봤다. 미래 산업의 핵심인 배터리 사업도 LG화학이 2000년 자동차 배터리 사업에 뛰어들어 관련 산업이 개화하기까지 15년 이상이 걸렸다. 이 같은 투자는 회사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이익을 얻었지만 단기 차익을 노리는 주주 입장에서는 손실만 본 사업이 된다. 상법 개정안대로라면 ‘주주의 이익’을 침해한 사례가 돼 손실을 본 주주들이 이사들을 향해 손해배상과 배임죄 등의 고발에 나설 수 있다.
경영권 공격을 가장 먼저 받는 기업이 공공서비스를 책임지는 상장사 한국전력(015760)과 한국가스공사(036460)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전은 전기료 인상을 추진할 때마다 대통령까지 나서 “요금 인상과 폭을 조절하겠다”며 압박을 가하면 인상 폭을 수정하거나 백지화했다. 정부의 눈치를 보는 한전은 현재 부채만 200조 원에 달하고 2021년 이후 누적 적자만 34조 원이 쌓인 상황이다. 가스공사도 1분기 기준 누적 미수금만 14조 원에 육박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대로라면 소액주주가 각각 38.86%, 42.07%에 달하는 한전과 가스공사 정부 눈치를 보느라 ‘주주의 이익’을 훼손한 사례가 된다. 투기 자본이 주요 주주로 들어와서 요금 인상 등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구조다. 재계 관계자는 “개정된 법대로 하면 투기자본이 천문학적인 적자에 정부에 배당까지 하는 한전에 무차별 소송도 가능하다”며 “현행 상법 개정안에 대해 신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