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아이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지난달 아주대병원 응급실에서 한 환자의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장중첩으로 응급실을 찾아 헤매던 소아가 경북에서 충청 지역을 거쳐 경기 남부 아주대병원까지 이송돼 치료를 받게 된 직후였다. 병원에 가지 못한 채 고통에 짓눌린 아이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부모는 “치료 잘해주셔서”가 아니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표현했다.
10개월째 이어진, 그래서 결국 해를 넘긴 ‘의·정 갈등’이 빚어낸 풍경이다.
지난해 초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의·정 갈등은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전공의 집단 사직과 의대생 집단 휴학, 의대 교수 일부도 학교를 떠났다. 전공의 사직 이후 수련병원은 모두 외래진료, 수술, 입원이 40∼50%대로 떨어지며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한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언론을 장식하는 것은 계엄과 탄핵,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이다. ‘이슈는 이슈로 덮인다’는 언론의 오래된 불문율이다. 장기 이슈 독점에 대한 피로감과 이제는 ‘위다웃 전공의’가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 점 등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문제는 진짜 현장이 안정화됐느냐이다. 의료개혁은 필수의료진 지원 급감, 지방 병원 의료진 구인난, 대학병원 인력 유출로 인해 ‘환자 뺑뺑이’가 이어지면서 당위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전공의 사직으로 ‘공회전’이 계속되는 동안 이 중 어느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 오히려 대학병원 필수의료진의 피로도는 더욱 높아졌다. 50∼60대 교수들이 짧게는 일주일에 한 번, 길게는 2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당직을 소화하느라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다.
교육과 연구가 좋아서 대학병원에 남은 사람들은 지난 1년 동안 교육과 연구도 사라지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병원 경영난 타개를 위해 외래만 열심히 ‘돌리다’ 보니 말만 대학병원이지 돈 적게 받으며 개원가에서 일하는 기분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벚꽃 피는 순서대로(수도권에서 떨어진 지역부터) 의사가 탈출하고, 그 지역 의료는 망한다” “대학병원 교수들은 용기가 없어서 못 나간 겁쟁이” 등 온갖 자조와 조롱이 넘쳐난다.
만약 초반에 언급한 아주대병원마저 그 소아 환자를 받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실 아주대병원은 지난해 9월 응급실 폐쇄 위기를 이미 겪은 바 있다. 경기남부권역응급센터라는 상징성이 크기에 응급실 불이 켜졌지만, 지난달 응급 환자를 보던 신경과 교수 2명을 비롯해 의료진 일부가 사의를 표하면서 ‘위기설’이 또 불거지기도 했다.
서울 지역 한 수련병원 의료진은 “빅5 빼고는 다 이렇게 겨우 간당간당하게 운영된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꽃피는 3월은 당초 ‘변화의 모멘텀’으로 점쳐졌다. 의대 입학생과 새로운 인턴, 전공의가 시작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엄과 탄핵이란 정치적 격랑 속에 의대 정상화는 요원해졌다. 봄의 상징인 벚꽃이, ‘순서대로 망하는’ 불행의 상징이 되지 않도록 정치 갈등과 별개로 의료 정상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정진수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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