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들’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12·3 비상계엄 이후 집회에 등장했던 가지각색의 깃발을 구경할 수 있다. 현재 약 600개의 깃발이 모였다. 실물의 깃발이 군집했을 때와 같은 위용은 없더라도, 바람에 펄럭거리도록 연출된 이미지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깃발의 내용은 전부 잡다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비공식적이다. ‘전국’ ‘연합’ ‘위원회’라는 이름에 맞는 실체를 갖춘 곳은 하나도 없다. 누가 일부러 기록하고 보존하지 않는 한 금방 사라지는 것들이다.
‘이페메라(ephemera)’는 일회용의, 일시적으로 쓰고 버리는 사소한 것을 가리킨다. 전단이나 티켓처럼 한 번 쓰고 마는 것은 애써 보관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 만드는 쪽에서도 기록, 보존, 열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런 일상적인 흔적을 아카이빙하는 건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누가 1년간 서울 종로구에서 배부된 전단을 종류별로 수집해 시간순으로 정리했다고 말한다면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냐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까. 하지만 ‘깃발들’을 보고 있으니,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효용이 끝나면 사라질 흔적을 굳이 붙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카이브 취향>의 저자인 아를레트 파르주는 18세기의 형사 사건 아카이브 연구로 전문성을 쌓았다. 그가 보는 아카이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잡범이었다. 그들은 억울하거나 분노한 상태로 두서없이 말하고, 곧잘 거짓말과 잡담과 헛소리를 섞었다. 나중에 열람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떠들었다. 그들의 이페메라를 모은 아카이브는 충격적으로 방대하고 시끄럽다. 그리고 파르주는 자신이 역사가로서 아카이브에 어떻게 빠져들었는지 알려준다. “‘생동하는’ 존재들이 압도적으로 덮쳐올수록 그들을 모두 알아보고 역사로 써내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 흔적의 무수함 앞에서 작업자는 한편으로는 멈칫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료되어 다가간다.”
저자는 아카이브를 열람하는 과정을 목소리들 사이에 표류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아카이브는 실재했던 삶의 자국이고, 다소 무질서하게 누적된 만큼 생동하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아카이브로 작업하는 동안 역사가는 그저 기록이 흘러가는 대로 떠돌아다닌다. 그러면서 파편적인 기록 너머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마주친다. “아카이브 취향은 이런 마주침 속에서 만들어진다. 아스라하거나 선명한 실루엣들과의 마주침, 언어의 조명을 받는 일이 거의 없는 매력적 그림자들과의 마주침, 적대하면서 동시에 적대당하는 존재들과의 마주침,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시에 자기 시대라는 폭력에 훼손당하는 사람들과의 마주침이다.”
아카이브를 만들고 읽고 공유하는 작업에는 자연히 통시적인 관점이 적용된다. 아카이브의 대상은 과거지만, 아카이브에 저장된 목소리는 현재의 목소리와 함께 재생된다. 아카이브는 일시적인 것들에 조금이나마 영원을 부여한다. 얼마 전 개최된 ‘남태령 아카이빙 심포지엄’은 사람들의 논의가 금세 휘발되지 않도록, 공공 역사를 위한 아카이브의 필요성과 현황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비상계엄령 이후 소식을 아카이빙하는 ‘12.03 아카이브’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