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앞서 존재해야 할 법이 재난이 발생한 후에야 발의되고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있어야 할 법으로 꼽는 것이 ‘생명안전기본법’이다. 대형 재난·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이 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그때뿐이다.
“이태원참사가 나고 유가족이 되니, 가장 뼈아픈 것이 생명안전기본법이 없다는 것이에요. 피해자 권리를 위한 기본적인 법이 없다 보니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조차 유가족들이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겁니다.” 몇해 전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싸우는 와중, 불쑥 건넨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심 놀랍고 반가웠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없으니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당장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먼저 요구하게 되고, 정치권은 당장의 사안만 해결하려고 하니 생명안전기본법은 자꾸만 뒤로 밀리게 되는 일이 반복됐다. 법안이 5년째 국회에서 표류하는 사이 2022년 이태원참사, 2023년 오송 지하차도 참사, 2024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했다.
재난·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역사는 생명안전기본법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해산했다. 윤석열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1년6개월 만에 진상규명 관련 내용을 축소한 채 겨우 통과됐다. 오송참사는 특별법조차 발의되지 못했다.
제주항공참사 특별법은 더 심각하다. 진상조사를 위한 내용이 아예 빠져 있다. 독립적인 조사기구 대신 국토부 산하의 항공철도사고조사위가 조사하면서 조사 대상이 되어야 할 국토부가 되레 조사 전반을 지휘·감독한다. 국토부 관료 출신들로 채워진 조사위는 민주적 절차나 조사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보고서로 제출하지 않은 채 12월 4~5일 사고 관련 공청회를 강행할 방침을 정했다. 유가족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빠른 조사보다 바른 조사”를 위해 국토부 산하가 아닌 별도의 독립적인 사고조사를 요구한다. 사회적 참사에 이어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사이, 유가족의 권리와 진상규명의 과제는 후퇴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당시 인권활동가와 연구자들은 피해자에 대한 혐오가 심각해지고, 참사가 피해당사자의 문제로만 인식되는 것을 ‘모든 시민’의 문제로 확장하기 위해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재난 속 혐오의 한가운데서 생명안전기본법의 작은 씨앗을 심어놓은 셈이다. 법안은 ‘피해자의 권리(제5조)’ ‘안전사고에 대한 독립적 조사(제18조)’ 등을 포함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약속을 말이 아닌 법으로 증명하라.” 정치인들의 수많은 말들을 들어온 세월호 유가족 김순길님의 말은 뼈아프다. ‘시혜적 위로’는 집어치우고 ‘정치적 애도’를 수행하기 위한 법의 언어가 필요하다. 국가가 허락한 애도, 관제 애도 대신 피해자와 모든 시민의 안전권을 강화할 대항적 애도가 절실하다. 특별법조차 만들지 못해 숨죽여 울고 있는 재난·참사, 산재 피해자들이 진실을 마주할 권리를 이제라도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생명안전기본법이 필요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