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양 선교사에게 감동을 준 이수정

2025-02-13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은 1883년 구미 국가 가운데서는 미국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 직후인 1884년 말 미국인 목사이자 역사가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는 이렇게 썼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여러 사절과 함께 조선의 젊은이들이 서양 언어, 과학, 기독교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왔다. 그들 가운데 여럿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들은 일본의 기독교단에 합류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은 리쥬테이(Rijiutei)로서 예전에 서울에서 귀족이었다. 그는 1882년 폭동(임오군란) 뒤에 동경으로 건너왔다. 이제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일본 안의 동포들에게 열심히 전도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그의 펜과 혀를 통해 이교도 지역의 모국어가 전도의 새로운 수단이 되고 있다. 외국어가 아닌 원주민의 언어가 현지인들에게 월등히 힘 있고 격조 높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William Elliot Griffis, 《 Corea, Without and Within 》)

특출한 인물로서 귀족이었다는 ‘리쥬테이(Rijiutei)’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리쥬테이’는 일본에서 통용되었던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이수정이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추적해 보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쌀, 소가죽 등과 함께 홍삼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이수정은 민영익 집에서 경영하는 홍삼 수출 문제로 부산항에 가곤 했다. 그는 원래 신분이 상인이었지만 지덕이 뛰어났다. 부산을 왕래할 때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과도 접촉이 있었다.

1881년 3월 이수정이 일본영사관을 방문한다. 그에게 일본 영사는 일본정부에서 한국어교사를 초청하려고 물색 중이라면서, 응해 줄 것을 제의한다. 이수정은 선뜻 응할 수 없었다. 주인인 민영익의 승낙 없이 일본에 갈 수 없는 노릇이고 더우기 자신이 학자라고 자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1년 뒤 1882년 7월에 구식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란은 쉽게 진압되고, 그 뒤 한국정부에서는 박영효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민영익이 김옥균 등과 함께 이 사절단에 참가하게 되자, 이수정이 민영익의 개인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다. 1882년 9월 20일 일행과 함께 일본 증기선으로 인천을 떠나 동경으로 향하게 되었다. 박영효와 민영익 등은 일본에 3달 동안 머문 뒤 귀국하였다. 이때 이수정은 주인 민영익의 허가를 받아 동경에 잔류한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이자 기독교 신자인 쯔다 센 (津田仙, 1873-1908)을 자주 만났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이수정을 동경외국어 학교 한국어교사로 초빙한다. 이수정은 1884년 8월 《조선ㆍ일본 선린호화(互話)》라는 학습서를 쓴다. 이 책은 본문은 일어로 되어 있고 그가 직접 쓴 서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책의 목적은 일본 학생들에게 조선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었다. 이수정은 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앞줄임) 때마침 본인은 일본문부성에 초빙되어 생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교수내용은 한국의 지리. 민정(民情, 국민의 사정과 생활 형편). 가산(家産, 한 집안의 재산), 고금의 역사. 조정의 체제에까지 미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나의 (한국어) 강의가 생도들에게 잘 이해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에 서로 묻고 대답한 것을 일일이 적고, 이것을 일어로 뒤쳐 책 이름을 《선린호화》라 하였다. (뒷줄임)”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위의 책 《선린호화》의 내용은 한국의 지리에 관한 것인데 권(卷) 1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권을 총서(叢書) 형식으로 간행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지리 다음으로는 한국의 민속ㆍ제도ㆍ정치ㆍ법률ㆍ문학ㆍ역사ㆍ산물 등에 대해서도 쓸 예정이었을 것이다.

탐구욕과 통찰력이 남다른 이수정은 쯔다가 빌려준 한문 성서와 교리서를 읽는다. 1882년 12월 25일 쯔다의 안내로 동경의 한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볼 때, 크게 감동되어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그 뒤 더욱 교리를 배우며 심취한다.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은 지 10여 일 뒤인 5월 11일 이수정은 동경에서 열린 <일본전국기독교도대대친목회>라는 신앙부흥회에 참가한다. 그는 이 대회에서 주최 쪽의 요청에 따라 한국어로 기도를 올린다.

이때 참가했던 우찌무라 간조오(內村鑑三, 1861-1930은 이수정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들은 마지막에 ‘아멘’하는 소리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그 광경을 더욱 오순절로 바뀌게 하였다. …우리들은 기적적이고 놀랄 만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두 느꼈다. 우리들은 다 같이 머리 위에 태양이 비치고 있는 것 같은 신기함을 느꼈다.”( 《 개화기 사람들 2 》)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성서공회의 총무 루미스Henry Loomis) 목사는 이수정을 이렇게 예찬한다.

“그는 일본에 온 지 불과 9개월밖에 안 되었으나 일어를 유창하게 말하였고, 두 번이나 훌륭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교를 하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또한 모두들 감탄하게 할 정도로 한시를 잘 지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일류신문사에서는 그가 쓴 것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이수정의 학문과 인품은 일본인뿐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을 방문하여 성서의 한글 번역을 부탁한다. 이수정은 이를 수락하고 번역에 착수한다.

이수정의 한글 번역본 《마가복음》은 요꼬하마에서 1,000부가 출판되었다. 1880년대 조선으로 향한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품에 안고 갔다. 이 뛰어난 조선인은 그 후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1886년 5월 그는 귀국하였다. 일본에 체류한 지 4년 만이었다. 그러나 도착 즉시 관헌에 끌려가 비밀리에 처형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를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 같다. 고국에서 아무런 활동도 못 하고 희생된 것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수정과 같은 인물들이 씨를 뿌리고 다리를 놓은 개신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고 활동함으로써 단시일 내에 한국사회에 파고들었다. 그들은 낡은 전통과 인습에 매여 있는 한국민 속에 들어가 전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사업으로 직접 간접으로 개화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런데 선교사의 전도에 호응하여 신자가 된 이들은 이수정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신흥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있던 자작농과 상인들이었다. 이 신흥계층은 개신교의 교리를 통한 청교도정신을 자기들의 새 도덕과 윤리로 삼았고, 자유와 평등사상에도 매력을 느꼈다. 그들은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한편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광린, 《한국사 강좌》

나라 밖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이수정은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수거’되었다. 특출한 인물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코 퇴출하고야 마는 양반들은 혀를 끌끌차며 한탄한다. “허허. 우리나라엔 인물이 없단 말이야. 허허허허.” 21세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인물이 계속 나온다. 기묘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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