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과 국가 위기 속, 한국 축구는 어떻게 흔들렸나

2024-12-04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 계엄령 선포 후 철회 과정에서 국가적 혼란이 빚어졌다. 4일 프로축구연맹은 사태가 빠르게 해결되면서 주말 전북 현대와 서울 이랜드간 승강 플레이오프와 향후 정규리그 운영 등에 대해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울산 HD 역시 아시아축구연맹(AFC) 소관 대회인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상하이 선화와의 원정 경기를 예정대로 치른다.

과거 계엄령 선포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축구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국가대표팀과 실업 축구 중심으로 운영되던 국내 축구에도 혼란이 발생했다. 1980년 9월 AFC 아시안컵을 앞두고 급히 소집된 국가대표팀은 한 달 남짓한 짧은 준비 기간과 제한된 훈련 환경으로 인해 전술적 완성도가 부족했다. 한국은 결승에 진출하며 저력을 보여줬지만, 쿠웨이트에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실업 축구 역시 주요 경기가 연기되거나 무관중으로 열리며 팬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한국 사회는 또 한 차례 큰 혼란을 겪었다. 반미 감정과 학생운동이 격화되면서 정부는 대규모 집회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조처를 했다. 프로축구 출범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와 겹쳤다. 출범이 지연될 수도 있었지만, FIFA의 각국 프로리그 체제 도입 권고에 따라 예정대로 진행됐고 한국 축구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1983년 5월 8일, 슈퍼리그라는 이름을 달고 프로축구가 정식 출범했다. 프로축구연맹에 따르면 원년 리그에서는 유공이 총 26만명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평균 2만1674명의 관중을 기록했고, 대우와 할렐루야도 각각 2만2845명과 2만1901명의 평균 관중 수를 보였다. 리그 전체로는 83만8956명의 총관중 수와 2만974명의 평균 관중 수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시기에는 관중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6월 10일, 마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한국-이집트 경기는 경기장으로 날아든 최루탄 가스 때문에 전반 29분에 중단됐고 경기는 0-0 무승부로 처리됐다. 이 사건 이후 K리그의 평균 관중 수는 6999명에서 2833명으로 급감하며 리그 흥행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87년 K리그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한 팀은 부산으로 총 9만4680명의 관중을 기록했는데, 평균 관중 수는 5260명에 그쳤다. 포항(총 8만2050명, 평균 4826명)과 울산(총 6만1500명, 평균 4393명)도 초창기 K리그 관중 수 대비 급격한 내림세를 보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K리그는 중단 없이 운영되었으나, 과거 사례들은 국가적 위기가 축구계에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계엄 체제에서 경기 일정이 연기되거나 무관중으로 진행되면서 리그의 연속성이 훼손되었고,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관중 수 급감은 리그의 존립 기반을 위협했다. 더불어 긴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의 경기력 저하와 대표팀의 전력 약화까지 초래하며, 한국 축구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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