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슬램게임: 드래프트에 참가하시겠습니까?] (002) 건국대 프레디 “태극마크 다는 날 올 수 있게 열심히 할래요!”

2025-09-04

[점프볼=이상준 인터넷기자] KBL 신인드래프트는 단 하루. 그 하루를 위해 살아온 시간은 수년. ‘25슬램게임’은 드래프트 지명과 KBL 무대 데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증명해야 할 의무를 가진 대학 농구 일원들의 생존기록을 담았다. 002번 참가자는 건국대 프레디 무티바이다.

#001_Scan. 002번 참가자: 프레디 무티바

콩고민주공화국 국적의 프레디는 12명의 남자 형제와 2명의 여자 형제로 구성된 무려 15명의 대가족과 함께 나고 자랐다. “우리 가족은 나까지 총 15명이에요. 아빠가 재혼하셨어요. 저는 첫 번째 엄마 밑에서 태어난 아들이죠.”

프레디는 전자제품 관련 일을 하며 농구 선수의 삶을 살아간 삼촌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농구를 접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삼촌은 또래보다 키가 큰 프레디를 주기적으로 농구장에 데려가며 프레디의 일상에 농구를 녹아들게 했다. “삼촌이 콩고에서 두 가지 일을 하셨어요. 하나는 전자제품 관련 일이고, 하나는 프로농구 선수였어요. 삼촌이 특히 제가 키가 크다고 생각해서 경기할 때 늘 저를 데려가셨어요. 늘 농구 경기를 보게 하신 삼촌 때문에 농구를 계속해서 좋아하게 되었어요.”

삼촌과 더불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농구 레전드 디켐베 무톰보 역시 프레디가 농구공을 잡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줬다. 프레디는 무톰보 재단이 진행한 농구 캠프에 참가하였고, 더욱 농구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많이는 못 갔는데 워낙 인기가 많은 선수예요. 무톰보 농구 스타일을 많이 배웠어요. 리바운드 잘하고 수비 열심히 해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선수예요. 추가로 비스맥 비욤보의 농구 캠프도 갔는데 두 선수 다 저랑 농구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영향을 준 선수들이에요.”

그렇게 농구와 연을 이어오던 프레디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농구 선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지구 반대편인 낯선 국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일본은 프레디와 같은 아프리카계 선수들을 자국 중-고등학교에 입학 시켜 농구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많았고, 프레디 역시 그들의 눈에 들어온 인원 중 하나였다. “일본은 농구부 한 팀에 70명이나 있어요. 그렇지만 아프리카 사람보다 키 작아요. 그래서 우리나라랑 나이지리아 같은 아프리카 선수들 많이 스카우트해갔어요.”

그러나 프레디의 일본 생활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그를 일본 학교에 소개해준 코치와 학교 관계자와의 갈등이 생겼고, 코치는 해고를 당하며 학교를 떠났다. 이때 코치는 프레디 포함 자신이 스카우트를 도와준 제자들을 모두 팀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콩고에서 일본으로 저를 데려온 코치님이 갈등이 생겨 팀을 떠날 때 ‘자기가 데려온 선수 다 데리고 나가겠다’라고 하셨어요. 저 포함 20명 정도 될 거에요. ‘이제 어떻게 농구를 이어가지?’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코치님께서 ‘프레디, 한국 한 번 가볼래?’라고 하셨어요.”

“그 코치님과 휘문고 김승관 코치님이 친구였어요. 자연스럽게 ‘같이 농구 한 번 할래?’라고 해주셨고, 휘문고랑 몇 번 운동하면서 시간 보냈어요. 그런데 어느날 김승관 코치님이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프레디, 너 일본 다시 가고 싶어? 아니면 한국에서 나랑 농구 할래?’ 고민도 안 하고 한국에서 농구를 하기로 했어요. 일본은 제가 갔을때도 이미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많아서 농구를 한 시간이 길지 않은 제가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컸거든요. 휘문고랑 운동하면서 한국 농구가 재밌어 보이기도 해서 바로 선택했어요.”

그렇게 프레디는 솔깃한 제안(?)을 수락, 2019년 낯선 한국 땅에서 고등학교 농구 선수 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안녕하세요.’ 이외의 어떠한 한국어도 모른 채 한국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는 모험을 택했지만, 프레디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한국 문화, 한국 농구에 스며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을 이어갔다. 그 중심에는 프레디의 삶에 긍정적인 자세를 더해준 휘문고 식구들의 따뜻한 지원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두원(수원 KT) 형 집에 살다가 2학년 때는 건국대 선배 조환희(KT) 형 집으로 갔었어요. 3학년 시절에는 김명진(동국대)이랑 휘문고등학교 앞 원룸에서 같이 자취를 했어요. 특히 명진이 부모님께 너무 감사해요. 저를 아들처럼 잘 대해주셨어요. 물론 명진이 말고도 다른 형들도 같이 살면서 잘 챙겨줬어요. 너무 고마워요.”

“휘문고 모든 분들께 감사해요. 송영진 코치님은 개인 운동도 많이 도와주셨고, 자유투가 약점이라 슛 쏘는 것도 잘 도와주셨어요. 그 덕분에 자유투 성공률이 좀 더 올라갔어요. 송영진 코치님의 아내분도 용돈도 주시고 하면서 많이 챙겨주셨어요. 크리스마스나 새해 첫날에는 송영진 코치님 집에서 밥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아직도 한국 첫 학교를 휘문고로 선택한 것을 최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 저는 아직 김승관 코치님은 ‘한국 아빠’라고 부르고 있고, 지금도 시간 나면 통화하고 있어요. 진짜 너무 감사한 코치님이에요.”

코트 안팎으로 그를 아껴주는 사람의 존재는 곧 마음의 안정으로도 찾아왔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프레디는 3학년 시절이었던 2021년 추계연맹전 안양고와의 결승전에서 23점 26리바운드를 기록, 휘문고의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큰 신장을 활용한 프레디의 골밑 장악력은 놀라웠고, 완벽한 퍼포먼스는 곧 한국중고농구연맹 최초로 외국 국적 선수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으로도 이어졌다.

“농구 하면서 처음 상 받은 것이 그 대회(추계연맹전) MVP였어요. 기분 많이 좋았어요. 그동안 적어도 우승 한 번 하고 고등학교 생활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워하고 있었어요. 정말 쉽지 않은 것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우승 한 번 하고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분 너무 좋았어요.”

#002_Life in University. (대학: 지명을 위한 1차 관문)

성공적인 고등학교 생활을 마친 프레디는 대학 입시 절차까지 거쳐 2022년, 건국대에 입학했다. 대학 리그 데뷔 경기에서 30점 16리바운드를 기록, 휘문고 시절 퍼포먼스를 그대로 이어간 프레디이지만 코트 밖에서는 고등학교와 다른 대학교의 스케줄이 다소 힘들었다고 전했다. 한국어가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한국 대학의 수업을 따라가는 것 역시 벅찼다고 한다.

“고등학교랑 대학교 문화 크게 달랐어요. 고등학교 때는 득점하기가 쉬웠는데 여기(건국대)는 달라요. 2m가 넘는 선수도 많고, 제가 볼을 로우 포스트에서 잡으면 무조건 트랩 수비가 들어왔어요. 체감상 3명이 저한테 달려드는 기분이었어요. 박스아웃 할 때도 똑같았어요(웃음). 특히 고등학교는 주말에 쉬는데 대학교는 그렇지 않아요. 운동도 훨씬 더 타이트해요. 여기에 공부를 안 하면 경기를 못 뛰다 보니까 학점도 열심히 따야 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나 프레디의 보드 장악력은 대단할 정도로 뛰어났다. 1학년 시절 그의 개인 기록은 평균 35분 45초 출전 20.7점 15.3리바운드 1.1블록슛이다. 프레디가 골밑에서 중심을 잡자 동료들도 편안하게 득점을 올리고, 수비에 더 힘을 쏟으며 참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프레디는 2022년 건국대 농구부의 창단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끈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다.

“우리 팀 모든 사람들 저 때문에 많이 고생했어요. 다들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특히 (황준삼)감독님과 (문혁주)코치님은 코트 내에서 저의 좋은 퍼포먼스가 나올 수 있게 늘 칭찬해주시고 좋은 말들만 해주셨어요. 저도 자신감 생겼어요. 운동 할 때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활약을 보인 프레디는 농구를 잠시 내려놓을 예정이었다. 2024년 초까지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선수여야만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제도대로라면 프레디는 드래프트 참가를 위해 반드시 귀화 절차를 거쳐야 했고, 1년 휴학 후 한국 문화에 좀 더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고 한다.

“그때는 한국 사람만 드래프트 나갈 수 있었어요. 감독님과 코치님은 제가 한국어, 문화 수업에 나가서 한국 문화에 더 적응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셨고, 자연스럽게 휴학을 생각했었어요. 지금도 건국대 내부 한국어 학습 센터에 다녀요. 근데 건국대 학생이 저 혼자에요(웃음). 나이도 제가 제일 어려요. 그래도 외롭지는 않아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한국어 공부하며 생활하는 것도 재밌어요.”

그렇지만 프레디의 휴학 계획은 ‘없던 일’로 끝났다. 2024년, KBL이 대한민국농구협회 소속으로 5년 이상 등록된 외국 국적의 선수도 드래프트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를 변경한 것이다. 드래프트 참여가 휴학 없이, 귀화 없이 가능해진 프레디는 더욱 농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좋았고, 한국에 감사한 마음이 커졌어요. 제가 프로농구 선수 도전할 수 있는 길을 더 열어준 것이니까요.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을 얻은 느낌이었어요. 도와주신 모든 분들이 많이 생각났어요. 그만큼 더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농구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커졌어요. 감사한 모든 분들에게 보답해야 하니까요.”

아무런 걱정 없이 농구에만 초점을 두게 된 일상. 프레디는 2024년, 3년 연속 리바운드왕에 올랐고, 건국대가 농구부 창단 이후 최고 순위인 3위를 기록하고 두 번째 챔피언결정전에 오르는 역할을 했다. 여러모로 프레디는 건국대 농구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휴학을 고민했을 시기였어요. 드래프트에 나갈 수 있는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기도 못 나갔을 거에요. 제가 만약 없었다면 우리 팀 센터 없어요.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을 거 같아요. 그래도 다행히 그대로 농구를 하게 되면서 동료들도 더 열심히 저를 도와줬어요. 그렇기에 3등 할 수 있었어요. 올해 대학리그는 꼭 우승해보고 싶어요!”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도 쌓았다. 프레디의 소속팀 건국대는 지난해와 올해 연세대와 함께 한국 대학을 대표, 아시아 대학농구 챌린지(AUBC)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대학들과 매치업을 이룬 것은 그의 농구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홍콩, 중국에서의 경험이요? 너무 좋았어요. 왜냐면 저와 매치업되는 사람들 다 스트롱 사람(몸싸움이 강하다)이었어요. 더 노력해야 프로에서도 인정받겠다고 느꼈어요. 한편으로는 그 대회 기간은 코트에서 밀리지 않고, 이겨내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그런 스트롱 사람들이랑 싸워서 이겨내면 제 농구 실력이 더 좋아지니까요. 얻은 것이 정말 많아요.”

농구 실력만큼 한국어 실력도 늘어나고 있다. 프레디는 건국대 저학년 시절까지 프랑스어 통역 없이 인터뷰하기에 제약이 있었다. 한국어로 인터뷰한다면, 단어 위주였다. 그러나 열심히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 결과, 프레디는 한국어 인터뷰를 큰 무리 없이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불편하면 프랑스어로 해도 됩니다”라는 기자의 말에 “아니에요. 한국말 할 거에요”라며 당차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국어는 학습 센터에서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내 동료들 덕분에 많이 늘고 있어요. (김)준영이가 제일 많이 도와줘요. 특히 프로에 먼저 간 박상우 형, 조환희 형, 최승빈 형 등등 이 형아들 정말 고마워요. 처음에는 예,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도만 했는데 동료들과 형아들 덕분에 이 정도까지 할 수 있게 됐어요.”

#003_Application. (드래프트 참여를 원하십니까?)

대학교 4학년 선수들에게 후반기 일정의 재개는 곧 프로 도전의 마지막 관문, 트라이아웃과 드래프트가 성큼 다가온 것을 의미한다. 프레디는 4년 연속 리바운드왕 도전은 물론이며, 팀의 우승과 득점왕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특히 그는 지난해 이대균(울산 현대모비스)과의 득점왕 경쟁에서 0.14점 차이로 밀리며 약간의 아쉬움을 삼킨 바 있기에 득점왕에 대한 목표가 제일 크다는 말을 전했다. 물론 그 속에는 약점 개선에 대한 의지도 담겨 있었다.

“리바운드왕은 당연히 하고 싶고,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우승과 득점왕이에요. 2022년에 이대균 형과의 경쟁에서 밀려서 2등 했어요. 그렇기에 득점왕을 하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 다음 우승하고 싶어요. 아직 제 약점은 슈팅이라 생각해요. 슈팅을 더 열심히 하는 선수도 되고 싶어요. 특히 드리블도 더 많이 연습하고 있어요. 다 잘하고 싶고, 약하다고 이야기 듣는 것도 다 만회하고 싶어요.”

치열한 경쟁 속 자기 PR의 중요성 역시 더욱 커진다. 취업준비생인 드래프트 도전자들이 입사 희망 기업인 KBL 10개 구단에게 왜 다른 도전자들보다 자신을 선발해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어필해야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렇기에 ‘25슬램게임’은 각 도전자들에게 ‘1분 자기소개’의 시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저는 감독님, 코치님들이 저한테 요구하는 것을 다 맞출 자신 있어요. 무조건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 따르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지금 건국대에서도 그래요.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시키는 것을 다 해야 우승할 수 있고, 더 좋은 선수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말 잘 들을 준비 다 됐어요. 팀을 한 단계 올라가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하고 싶어요.”

#004_My Future (‘프로’농구 선수 프레디의 삶은?)

누구나 행복한 상상이라는 것을 해본 적 있지 않나. KBL 일원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드래프트 참가자들은 저마다 한 번씩 “내가 프로 선수라면?”이라는 행복한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프로 선수가 된 당신은 어떤 플레이를 펼치고 팬들과 동료들에게 어떤 칭호를 받는 선수가 되어있을 것 같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대한 물음에 프레디는 ‘한국 국적’을 보유한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를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귀화 꼭 하고 싶어요. 귀화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한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어요. 귀화를 하기 전에 좀 더 한국 농구, 한국 문화에 녹아들고 싶으니까요. 그런 후 언젠가는 라건아 선수처럼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농구 선수로 활약 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코트에서는 리바운드 다 잡고 외국 선수 수비도 적극적으로 도맡아 하는, 성실한 선수라는 이야기 듣고 싶어요.”

“부모님께 프로 선수가 되어서 인사드리고, 효도하고 싶어요.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콩고에 간 적이 없어요. 매일 영상 통화하고는 있지만, 진짜 너무 많이 보고 싶어요. 프로 선수 자격을 얻어 콩고에 가는 것도 꿈이에요.”

개인 프로필을 적는 시간, 프레디가 한국어를 한 자 한 자 노트에 적는 시간은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더 걸렸다. 그러나 목표를 적는 순간 프레디의 필기 속도와 미소는 그 누구보다 빠르고 밝았다. 이처럼 프레디는 그 누구보다 강한 목표 의식을 가진 선수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견고한 골밑에서의 플레이를 보여줄 프레디의 미래가 기대된다.

#사진_프레디, 김준영 제공,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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