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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때로,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개인의 삶을 뒤틀어버린다. 평소에 개인과 집단, 세상, 사회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건 말건 상관없다. 속세를 떠나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살아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외면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로 개인의 모든 것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 지진처럼, 해일처럼, 언젠가 우주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소행성처럼 무자비하고 예외는 없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보사노바 뮤지션의 실종을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다. 2004년, 보사노바의 황금기를 책으로 쓰려는 제프 해리스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취재를 시작한다. 취재원에게 피아니스트인 테노리우 주니오르의 음반을 선물로 받는다. 처음 들은 테노리우의 연주에 매혹된 제프는 그의 행적을 파고든다. 1976년 아르헨티나 투어를 간 테노리우는 공연이 끝난 후 새벽에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실존 인물이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의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은 우연히 테노리우의 음악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그를 알았던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2년간의 취재 후 다큐멘터리 대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제프 해리스는 트루에바 감독을 재창조한 캐릭터다. 일반적인 다큐라면 인터뷰 장면과 자료 화면 등으로 구성했을 것이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가상의 주인공이 실제 인물을 추적하는 구성으로 현재와 과거, 상상하는 장면까지 모든 것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했다. 현실과 가상을 나눌 필요가 없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테노리우의 실종은 현실이다. 아내와 다섯 명의 자식이 있는 테노리우는 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당시 아르헨티나는 막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였다. 거리에는 무장한 군인이 상주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검문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눈에 거슬리면 바로 체포했다. 새벽에 거리를 지나던 테노리우도 검문에 걸린 것일까. 제프는 당시 정부와 군대 관계자들과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구체적인 증언을 확보한다.
장발에 수염을 기른 테노리우는 공산주의자의 외모라며 체포됐고 구금시설에 끌려갔다. 고문을 당했고, 군인들은 그가 브라질 국민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테노리우는 유명한 뮤지션이라 브라질에 돌아가면 실종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하는 인터뷰를 할 것이고, 군사 쿠데타의 무차별적 폭력이 폭로될 것임을 꺼린 군에서는 그대로 처형했다.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있었다 해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보사노바 음악에만 매진했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주앙 지우베르투와 함께 보사노바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던 천재 뮤지션의 인생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1989년 한국에서 개봉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루이스 푸엔조 감독의 <오피셜 스토리>(1985)는 아르헨티나의 군사 쿠데타 이후 벌어진 폭력적인 사건들을 다룬 영화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독재 치하의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명이 사라졌다. 거리에서 잡혀간 청년, 군인과 경찰이 집에 난입해 심야에 끌려온 사람들은 불법 구금시설에 감금됐다.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임신부들은 따로 관리되다가 아이를 낳으면 처형됐다. 신생아와 아이들은 국내외 아이 없는 부부에게 입양됐다. 시체들은 헬기로 바다에 버렸다.
모두 거짓말 같다. 과장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모두 사실이다. 1977년부터 실종자의 어머니들은 딸과 아들의 사진을 붙인 피켓을 들고 5월 광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5월 광장의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당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핵심이었다. <오피셜 스토리>는 실종자의 아기를 입양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여성이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테노리우는 처형당할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어떤 죄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던 중남미의 아르헨티나, 칠레, 니카라과 등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살해당했다. 쿠데타 세력에 반대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무고하게 살해당한 사건들. 과거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될 비극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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