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 같은 특별연장근로

2024-12-11

정부의 재정 지원 근거조항과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을 담은 반도체특별법 공방은 한국에서 정치가 경제 활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다른 나라에도 근로시간 제한이 있지만 한국은 유독 경직적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저녁 있는 삶’을 돌려준다면서 도입한 주 52시간제는 오히려 기업의 손발을 묶었고,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상상황을 대비해 근로기준법(이하 근기법)에 ‘특별연장근로’ 조항을 뒀지만, 이 정도로는 근로시간 부족 상황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 지긋이 몰두하지 않으면 큰 진척을 보는 게 없다. 특히 첨단 분야에서는 시간 제한을 두면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 미국 실리콘밸리에도 시간 제한이 있다. 하지만 임원과 전문직에 대해선 예외가 적용된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다. 혁신은 때로 밤을 새우는 숙고의 시간을 거쳐야 나오기 때문이다. 미국 경쟁력의 원천이다.

주 52시간 제한, 혁신에 걸림돌

특별연장근로 쓰려면 까다로워

반도체특별법으로 유연해져야

거대 야당은 이런 현실을 외면한다. 근기법에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활용하면 근로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다. 과연 그런지, 도대체 뭐라고 돼 있는지 관련 조항을 읽어봤다. 근기법 제53조 제4항이다. 그 요건과 절차를 살펴봤더니 그림의 떡 같은 제도 아닌가 싶었다.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관청에 민원을 넣거나 소송을 걸라고 하지만, 그 절차가 번거로워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고 보면 된다.

제53조 제4항을 구체적으로 보자.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당사자 합의에 따른 통상의) 연장근로와 탄력적·선택적 근로 시간제의 연장근로를 (추가로) 연장할 수 있다.’ 이 조항만 보면 그냥 신청서를 적어 제출하고, 장관의 인가와 근로자 동의를 받으면 일사천리로 될 것 같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조항의 구체적인 이용 방법은 근기법 시행규칙 제9조에 규정돼 있다. 그 내용을 보면 ‘3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3대 요건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 ▶대상 근로자의 개별 동의를 받을 것 ▶고용부 장관의 인가를 받을 것이다. 여기까지도 절차만 따르면 된다고 치자. 그런데 ‘특별한 사정’이 뭔지 살펴보면 좀 복잡해진다. 모두 다섯 가지 경우가 있는데 ‘1. 재난·사고, 2. 인명보호, 3. 시설 고장 등 돌발 상황, 4. 업무량 급증, 5. 연구개발’이 포함된다.

반도체산업이라면 주로 연구개발이 ‘특별한 사정’에 해당한다. 여기서 특별연장근로는 법정 근로 40시간+통상의 연장근로 12시간+특별연장근로 12시간을 합해 주당 총 근로시간은 64시간까지 허용된다. 1년간 90일(돌발상황과 업무량 급증은 180일) 이내가 한도다. 90일을 넘겼다면 고용노동부의 심사를 거쳐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끝없이 혁신이 일어나야 하는 반도체는 프로젝트마다 최소 1~2년 선행 투자가 필요한데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과연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만 사태가 급박해 인가를 받을 시간이 없는 경우에는 사후에 승인 신청서와 동의서를 제출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일일이 근로자 동의를 받고 최장 90일 이후에는 또 승인을 받아야 한다. 더구나 발주서와 계약서는 물론 납기조정 내역을 제출하고 인력 대체를 위한 노력을 증명해야 하며, 예상 손실까지 보고해야 한다. 이래서는 한국보다 근로시간 제한이 유연한 엔비디아와 대만 TSMC와 경쟁하기 어렵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삼성전자는 기술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라며 TSMC의 우월감을 드러냈을 정도로 한국 반도체는 비상상황에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 연구개발 분야에서 특별연장근로를 실시하고 있다. 절차가 까다롭지만 달리 선택이 없다. 이 사안은 반도체 산업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업무량 폭주 등을 이유로 특별연장근로가 허용된 건수는 올 1월부터 10월까지 5230건이었다. 5인 이상 사업체가 약 77만5000개라고 볼 때 이용률은 0.7%에 그쳤다. 특히 연구개발을 이유로 승인받은 경우는 28건에 그쳤다.

한국은 이미 주 52시간 체제에 익숙해 있다. 사회 전반에 ‘칼퇴근’하는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의 DNA가 근로시간 제한 때문에 약해져선 안 된다. 성장률 1%대 탈출을 위해서라도 주 52시간은 유연해져야 한다. 계엄 쇼크 와중에도 경제를 방치해선 안 된다. 국익을 위한다면 반도체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 핵심 산업의 경쟁력을 잃으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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