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2024-10-15

안혜주, 수필가

들판이 온통 황금빛이다.

노랗게 물든 벼 이삭 사이로 재잘거리는 참새들의 수다가 경쾌하다. 여문 곡식을 앞에 두고 신이 났을까. 벼끼리 몸을 비비며 사락거리는 소리에 놀랐을까. 농촌의 가을 풍경이 평화롭기만 하다.

추수를 끝낸 논에는 벌써 하얀 공룡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공룡알이란 추수가 끝난 뒤 남은 볏짚을 모아 가로와 세로 1m 크기로 만든 덩어리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곤포’인데 농촌에서는 흔히 ‘공룡알’이라 부른단다.

제주도의 가을이 노란 귤 밭이라면 육지의 가을은 눈사람처럼 하얀 공룡알이다.

20여 년 전, 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국적인 풍경을 좋아했던 나는 패키지여행을 신청한 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이탈리아였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도시 외곽을 돌 때였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오래된 건축물이 눈길을 끌었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의 공룡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낫으로 벼를 베고 탈곡한 후, 일일이 볏짚을 묶어 차곡차곡 쌓아 놓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공룡알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게 뭘까, 저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기만 했을 뿐 그 안에 볏짚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낮잠을 자거나 잡담하며 밖을 내다보지 않았지만, 난 새로운 풍경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본 그 신기한 공룡알이 농부들의 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고 한다. 공룡알 한 덩어리가 500㎏ 정도인데 때로는 벼농사보다 볏짚 수입이 좋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힘없는 지푸라기가 아닌 어려운 농부들에게 보탬이 되는 든든한 볏짚이다.

사실 볏짚은 다양한 곳에 도움을 주는 벼의 줄기다. 토양을 살리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외양간 가축들의 이불이 되기도 한다. 초가집 지붕을 덮어주고 소의 먹이로도 그만이다. 짚신을 만들어 팔아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던 상인들, 셀 수 없이 많은 역할에 고마울 뿐이다.

볏짚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소 키우는 일을 매우 좋아하셨다. 새벽부터 일어나 작두에 볏짚을 썰고 여물 만드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정성스레 준비한 여물을 여물통에 넣을 때 소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소의 생명을 보장하기도 하고 농부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볏짚.

이 볏짚의 존재처럼 우리도 다른 존재에 도움이 되는 삶이라면 좋겠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미련 없이 떠난다. 화려했던 단풍이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한때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그러니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이해하는 삶은 어떨까.

마음의 가을 풍경을 그려보자. 오곡이 풍성한 황금빛 그림도 좋고 울긋불긋 단풍도 좋다.

다만 두고두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이라면 더욱 좋겠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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