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눈높이, 소마이 신지의 발견

2025-08-18

이삿날 아침, 세 식구가 독특한 삼각형 모양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대화가 어딘가 삐걱거리는데, 알고 보니 이사는 아빠 혼자 간다. 부모의 별거 다음은 아마도 이혼일 터. 활달한 초등학생 소녀는 단둘이 살게 된 엄마가 목록까지 만들어 집안일을 나눠 하자는 것도, 친구처럼 가까웠던 아빠가 전화기 너머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동급생들이 부모가 이혼한 아이들을 두고 수군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펼쳐지는 ‘이사’는 일본 감독 소마이 신지(1948~2001)의 1993년 영화. 지난달 말 소규모로 개봉해 벌써 3만명 넘게 관람했다. 같은 감독의 1994년 영화 ‘여름정원’도 이달초 개봉해 관객 1만명을 넘었다. 이번엔 초등학생 소년 세 명이 주인공이다. 낡은 집에 혼자 사는 노인이 곧 죽을 거라는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발칙한 호기심이 발동해 관찰에 나선다. 발칙하기는 ‘태풍 클럽’의 중학생들이 한 수 위. 종잡기 힘든 10대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이 태풍 몰아치는 밤에 폭주하듯 터져 나온다. 같은 감독의 1985년작 영화인데, 지난해 첫 개봉 이후 다시 개봉했다. 덕분에 이 감독의 수십 년 전 영화가 세 편이나 나란히 상영 중이다.

소마이 신지? 실은 웬만한 영화 팬이 고개를 갸우뚱할 이름이다. 2001년 암으로 53세에 별세한 그는 세계적 명성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에서는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등이 열린 적 있지만 극장가 개봉은 ‘태풍 클럽’이 처음. 그와 비슷한 연배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1990년대 말 ‘하나비’를 시작으로 한국에 한창 소개된 것과 딴판이다. 사실 해방 이후 일본영화의 수입·상영이 전면 개방된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김대중 정부가 단계적으로 추진한 일본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 1차 때는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 등에 한해 일본영화의 수입·상영을 허용했다. 그 무렵 ‘하나비’는 베니스영화제 최고상 수상작이었다. 반면 소마이 신지는 해외 수상 경력이 없다. 일본 내에서의 평가는 최근 그의 작품들이 여럿 디지털로 복원되고, 하마구치 류스케를 비롯해 세계적 주목을 받는 일본 감독들이 그의 영향을 여러 차례 거론한 데서도 짐작된다.

눈 밝은 국내 수입사들 덕에 뒤늦게 몇 편을 본 관객일 따름이지만, 소마이 신지의 작품은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는 영화의 힘을 보여준다. ‘이사’나 ‘여름정원’은 아이들을 주인공 삼은 일상의 드라마 같지만, 어른 눈높이로 동심을 재단하는 대신 때로는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을 스스로 겪어내는 아이들을 그려낸다. 이 반짝이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영화계에 입문하고 데뷔한 것이 일본영화의 침체기라는 것도 눈에 띈다. 눈부신 질주를 해온 한국 영화계가 침체에 빠진 지금, 다시 발견될 만한 감독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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