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색 뺀 일본식으로 고치되 일본 수도보다는 격 낮게

2025-11-27

한양의 일본식 개명에 깔린 제국주의

교토(京都)라는 도시 이름은 좀 유별나다. 둘 다 수도를 의미하는 ‘경(京)’과 ‘도(都)’가 함께 붙어있다. 동어반복인 셈이다.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관서지방 사람들은 줄여서 ‘쿄(京)’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1868년에 에도(江戶)를 동쪽의 수도라는 뜻의 동경(東京)으로 명명하고 천도했을 당시 다수가 새 수도의 이름을 ‘도쿄’가 아닌 ‘도케이’라고 읽었다. 심지어 ‘京’의 이체자인 ‘亰’을 써서 ‘東亰’이라고 표기했다. 일본어에서 경(京) 자는 ‘쿄’로도 ‘케이’로도 읽힌다. 그러나 왜 東京을 사투리처럼 들리는 도케이로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제설 분분하나 납득할 만한 견해는 아직 없다. 추측건대, 천황이 거주해온 천년 고도(古都) 교토에 한해서만 ‘쿄’라고 칭할 수 있다는 사대부 계층의 묵계가 있지 않았을까. 즉 새로운 수도명에 들어간 ‘경’의 발음과 글자를 낯설게 함으로써 유일무이한 특권적인 공간으로서의 ‘쿄(京)’의 권위를 보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교토에 있던 천황이 에도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 도쿄가 근대화 개혁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된 19세기 말경부터 신수도의 이름은 도케이가 아닌 도쿄로 정착했다.

식민 도시 이름 바꾸는 서양 모방

동남아 점령 때 서양 고유명사 축출

‘한성’의 ‘한’은 중국 문화여서 배제

도시 뜻하는 ‘성’ 붙여 ‘경성’으로

수많은 동·리 지명은 내버려 두고

한성 요지, 일인 거주지 이름은 바꿔

이름은 권력을 반영한다

20여년 전 신문에 웃지 못할 기사가 실렸다. 1998년 베이징대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서울대 총장을 초청하는 초청장 수신처로 서울 성북구 소재 한성대로 적어 보내는 바람에 한성대 총장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울을 한성(漢城)으로 표기했고, 따라서 서울대는 한성대(漢城大)로 통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재 중국은 서울시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의 발음에 가까운 ‘首爾(서우얼)’로 표기하고 있지만, 그러기까지 기존의 ‘한성’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왜였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자.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은 남산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왕조 시대에 한양-한성으로 이어져 온 수도 명칭을 경성으로 바꿨다. 왜 한성(漢城)을 경성(京城)으로 교체했을까? 화혼한재(和魂漢才)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한(漢)’은 곧 중국 또는 중국문화를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의 영향력이나 존재감을 반영하는 한성 대신에 경성이라는 새 수도명을 채택함으로써 헤게모니의 교체를 선언하고자 했을 것이다. 경성은 조선이나 일본에서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종종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따라서 일견 한성에 비해 가치 중립적인 데다, 경(京) 자가 들어감으로써 한층 호격이 높아진 듯한 인상을 준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사는 도시를 경(京) 이라 했고, 헤이안쿄(平安京) 같은 일본의 옛 수도명은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京) 자를 채택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앞으로 지배하게 될 나라의 수도 이름을 본국의 교토나 도쿄와 동격으로 정했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경성의 일본어 발음은 ‘쿄조’가 아니라 ‘케이조’였다. ‘쿄(京)’는 권위가 부여된 수도에만 허용되는 독음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경성이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서울(京)과 도시(城)의 의미가 뒤섞여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수도다운 규모를 갖추지 못한 도성의 어감을 준다(베이징의 자금성은 영어로 ‘forbidden city’로 번역된다). 여기서 京城과 京都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즉 경성은 경도의 하위 심급에 위치하는 식민지 수도에 부여된 명칭이었던 것이다.

1854년 6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페리 제독의 2차 일본원정함대가 요코하마에 상륙했을 때, 일부 병력은 상륙지 일대를 측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지도 작성을 위해서였다. 작성된 지도에 현지의 지명은 필수였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페리 제독이 타고 온 프리깃함 미시시피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 일대를 미시시피만이라 명명했다. 만일 당시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가정하면 지금 요코하마 부근 해역은 미시시피만으로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서양인들은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거나, 거점화했을 때 맨 먼저 이름부터 붙였다. 명명 행위는 정복의 일부이고 또 정복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이름에는 누가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야 했다. 미 동부 최대 식민도시의 이름이 뉴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바뀐 사실만으로도 어떤 외세들이 영역점유를 놓고 각축을 벌였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대만 도시도 일본식 이름으로

메이지 유신 직후 홋카이도 개척에 나선 일본은 한자 두 음절로 지명을 정비했다. 아이누 언어를 반영하여 개명하거나 일본 본토의 지명을 도입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명명 방식은 일본의 첫 식민지가 된 대만에도 적용되었다. 원주민 언어가 한자화된 것을 일본식 독음으로 읽거나 ‘다카오(高雄·가오슝)’처럼 일본식으로 명명했다.

일본은 조선에서도 지명 정비에 나섰지만, 도시나 촌락의 기존 한자 지명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던 지역 단위 동(洞), 리(里)도 그대로 유지했다. 기존 지명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수천, 수만 개에 이르는 지명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익도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 무주공산에 가까웠던 신대륙에서조차도 산과 강, 언덕과 개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미 서양인 입식자(入植者)들이 경험한 바 있다. 단지 남산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역과 경성의 상징공간은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지금의 세종대로는 태평통(太平通·다이헤이도리), 을지로는 황금정(黃金町·고가네마치), 명동은 본정(本町·혼마치)으로 명명했다.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위 고유명사들은 타이베이의 일본식 지명에도 등장한다. 이러한 명명에는 새로운 지배 주체가 누구인지를 널리 알림과 동시에 외지(外地)의 내지화를 통해 본국으로부터 더 많은 입식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동남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둔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들과 전쟁에 돌입했다. 선제공격에 나선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 각 도시를 점령했다. 전쟁협력을 얻기 위해 현지 주민의 회유·포섭에 나선 점령군은 먼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동아(東亞)의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서양식 고유명사를 축출했다. 홍콩에서는 영어 간판을 금지시켰고, 영국식 고유명사는 모두 일본어로 바꿨다. 퀸스 로드(Queen’s Road)는 메이지(明治)통, 홍콩 제10대 총독의 이름을 딴 데 보 로드(Des Boeux Road)는 쇼와(昭和)통으로 바꿨다. 대영제국 패권의 흔적을 말소한 자리를 일본 천황들의 연호로 대체함으로써 통치 주체의 교체를 알린 것이다.

1942년 영국이 통치하던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곧바로 개명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영어식 이름이었던 싱가포르를 소남도(昭南島)로 바꿨다. 소화(昭和)시대에 일본이 남쪽에서 획득한 섬이라는 뜻인 듯하다. 1819년 싱가포르를 영국관할령으로 만든 토머스 래플스 경의 이름을 딴 래플스 호텔을 소남(昭南)여관으로 개명하고 일본군 장교 숙사로 활용했다.

아편전쟁 이후 ‘대당’은 ‘시나’로

고래부터 일본에서 중국에 대한 호칭은 ‘대당(大唐)’ ‘대명(大明)’이었다. 일본에게 중국은 대국이었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더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일본인들은 중국을 ‘시나(支那)’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이어졌다. 진(秦)에 대한 산스크리트어 발음은 치나, 프랑스 발음은 쉰느(chine)이다. 시나는 일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가치 중립적인 호칭이었지만, 실제로는 서구열강의 시각을 빌려 화이질서 해체 이후 수정된 대외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시나는 점차 멸칭에 가까워졌다. 동시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상하이(上海)’ ‘칭다오(靑島)’ ‘페킹(北京)’ ‘난킹(南京)’ 등 중국의 일부 지명을 서양인이 발음하는 현지음으로 부르는 관행이 형성되었다. 모두가 외세의 침략 이후 서양인들의 입에 자주 오른 중국 고유명사들이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어에서 시나는 중국·중화로 바뀌었지만, 페킹·난킹으로 부르는 관행은 여전하다. 서울 경 자가 들어간 동아시아의 한자어 지명 중 도쿄와 교토의 ‘경’만이 특별하게 읽히는 전통도 건재하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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