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우의 무지(無智) 무득(無得)]니체의 기사(騎士)

2025-01-02

“문화가 이토록 천박해지고 황폐해지는 시대에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 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상징은 (중략)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끔찍한 동행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욕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이 기사가 바로 쇼펜하우어와 같다.”

신의 죽음을 선언하여 유럽을 망치질했던 니체(F. Nietzsche)의 첫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유럽은 지금의 대한민국만큼이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가 누구이기에, 니체가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아줄 기사(騎士)라며 그리워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Welt als Vorstellung)와 의지의 세계(Welt als Wille)로 설명한다. 전자는 현상계(現象界)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며,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과율에 지배된다고 말한다. 후자는 현상 이상의 본질적 존재를 말하는데, 현상계라는 인식의 결과를 낳는 것은 우리의 신체이며, 이는 내면의 의지(Wille)와 인과적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화된 의지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서로 연기(緣起)되어 궁극적으로는 우주 전체의 의지를 이룬다는 개별화 원리를 제시한다.

한편, 그가 불교에 심취하여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표상의 세계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의지 세계는 인간의 '살려고 하는 의지'로서 '욕망' '갈구'까지 포괄하는 개념인데,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면 의미가 명확해진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념(理念, Idee)을 연결지어,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결국 그 의지가 하나의 우주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자비심(慈悲心)과 보시(布施)를 행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출 수 있도록 관조(觀照)를 통한 수행만이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 방법임을 주장한다.

이제 젊은 날의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그리워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함은 물론 자신과 인연(因緣)이 닿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해(害)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쇼펜하우어만이 사회의 천박함과 황폐함을 소멸할 수 있는 기사(騎士)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켜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독(三毒)이라는 탐진치(貪瞋癡). 물질적인 것과 권력 등을 끝없이 얻으려는 탐욕(貪慾),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보이는 진에(瞋?), 진리(만물의 원리와 자연의 섭리)에는 무지하여 어리석은 우치(愚痴). 범인(凡人)은 이 중 한 가지만 가져도 (정상적인) 주변으로부터 신랄하게 비판을 받을진대,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동시대에 존재하니 어찌 대한민국의 2025년이 안녕하겠는가? 여기저기서 나대고 있는 정치꾼들은 탐진치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괴롭히는 크고 작은 문제의 이기적 괴수(魁首)일 뿐이다.

세상의 섭리를 알고 사소한 일마다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어떠한 부, 귀, 명예도 구하지 않으며, 탐진치 세 가지 독을 경계하며 살고 있는 국민 여러분이 바로 2025년 대한민국을 구해 낼 니체의 기사(騎士)다.

이강우 동국대 AI융합대학장 klee@dongguk.edu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