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에 빠진 지도자, 어떻게 나라 어지럽히나…거대한 실험장 된 한국

2025-01-10

지구촌 흔드는 ‘새로운 음모주의’

화나고 부끄럽지만 인정하자. 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은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신봉하는 대통령이 탄탄한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그 결과를 국민과 국가가 어떻게 감당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세계적 실험장이 되어 버렸다. 기왕 실험이 벌어졌고 피할 수도 없으니, 의연하게 생각하고 야무지게 행동하자. 뭐부터 해야 할까? 그래, 문제의 발단에서 출발하자. 바로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과학적이거나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태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는 내러티브 그러니까 이야기다. 음모를 이야기하는 음모론은 보통 세 개의 요소로 구성된다. 사악한 행위자, 은폐된 계획, 마지막으로 사회에 해가 되는 목표다. 비밀스럽게 집단을 이루어 사회적으로 해로운 목표를 모의하는 사악한 행위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음모론이다. 기실 음모론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음모론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방안을 향한 첫 스텝은 허황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거다. 음모론, 루머, 가짜뉴스는 절대 없앨 수 없다. ‘어마무시한’ 독재국가(스탈린의 소비에트나 히틀러의 나치독일 또는 김일성의 북한)도 그런 비공식적 정보들을 없앨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음모론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이 커졌기에, 없애는 방안이 아니라(!) 대처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두 사건이 중요하다. 첫째, 코로나19팬데믹이다. 질병의 원인과 백신과 관련한 여러 음모론(‘코로나19는 조작’이라거나 ‘백신은 세뇌 수단’)은 전 세계인의 건강과 안전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도널드 트럼프라는 ‘사건’이다. 45대(2017~2021년)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고 다시금 47대 대통령이 될 트럼프에게 음모론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다.

히틀러·스탈린·김일성도 근절 못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팬데믹의 유행 이후 중요성과 영향력이 급격히 커진 음모론의 특성을 일군의 음모론 연구자들은 “새로운 음모주의(New Conspiracism)”라고 부른다. 역사와 사회를 주동하는 음모의 역할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뜻하는 음모주의는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다. ‘정보 출처의 신뢰성과 증거의 객관성과 주장의 논리성’을 중시하는 것이 옛 음모주의라면, 새로운 음모주의는 ‘소문이나 근원적 불신에 입각한 극단주의적 선동’을 전면에 내세운다. 중요한 건 ‘사실적 진실’이 아니라 ‘원하는 진실’이다. 전자가 차갑다면, 후자는 뜨겁다. 급진주의적 선동은 침착한 냉정보다 조급한 열정에서 빛을 발한다.

새로운 음모주의가 정치적 공론장은 물론이고, 우리네 일상의 언어와 문법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크고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가령 2024년 12월 29일 있었던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보자. 참사의 원인에 대해 밝혀진 바가 거의 없지만 예단들이 이미 넘친다. 내란 세력의 끔찍하고 비열한 계획에 놀란 사람들은 참사의 배후를 걱정한다. 반대로 반헌법적 극단주의자들은 참사가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사회가 음모주의로 오염되면, 심각한 사고나 사건이 음모론으로 해석, 설명되기 마련이다. 음모론이 언제나 오류인 건 아니겠지만, 음모적 예단은 사안의 적절한 탐구를 방해한다.

사고나 사건에 대한 음모적 예단이 ‘생산’되는 과정을 음모론 연구자들은 “음모론 거푸집”이라 부른다. 거푸집 곧 주형(template)은 만들려는 물건의 모양대로 속이 비어 있는 모형이나 틀이다.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거푸집에 새로운 사건을 투입하면, 거푸집으로 재단된 음모론이 배출된다.

1997년 8월 다이애나 스펜서가 파리에서 사망했다. 파파라치의 끈질긴 추격을 피하는 와중에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현재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왕세자 시절 배우자였던 다이애나는 1996년 이혼 후에도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사망이 알려지고 불과 2시간이 지난 후, 사건에 대한 최초의 음모론이 인터넷에 등장했다. 음모론의 생산지는 프랑스나 영국도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음모론 거푸집이 작동한 결과였다. 다이애나의 사망이라는 정보를 거푸집에 투입하자, 거푸집에 맞게 재단된 음모 이야기가 바로 배출되었다.

음모론 거푸집이 번성하면 문제가 되는 사안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해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음모론 거푸집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적지 않은 음모론이 재미와 여흥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구는 평평한데, 과학자와 정치인과 언론이 공모하여 지구가 둥근 것처럼 믿도록 강요한다’는 지구 평면설(Flat Earth)은 재미와 여흥으로 소비되는 대표적 음모론이다.

사실 음모론을 ‘엄근진’ 그러니까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만 생각하는 건 음모론이라는 문화 현상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방금 말한 바처럼, 음모론 소비의 많은 부분이 재미와 여흥이라는 동기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모주의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음모론의 ‘다크’한 측면 곧 사회의 존속을 어렵게 만드는 음모론의 효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래의 음모론(conspiracy theory proper)’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의 음모론 또는 엄밀한 의미의 음모론은 민주적 담론의 근본 규범들을 위반하거나 파괴하는 음모론을 지칭한다. 여러 논자가 나름의 정의를 제안하지만, 대략 세 가지 요소를 추릴 수 있다.

첫째, 본래의 음모론은 모든 사회 현상의 배후에 전능한 공모자가 암약한다고 상정한다. 사건과 정보를 전방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공모자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전능한 상대는 한편으로 체념과 패배주의를 키우기도 하지만, ‘우리 편’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도록 강요하는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둘째, 아군과 적 또는 선과 악의 이원론에 따라 세상을 관찰한다. 이원론 관점은 정치에서 특히 위험하다.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정당이나 세력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로 이원론이다. ‘이번에 정권을 잃으면 우리는 끝이야.’ 선과 악의 이원론은 정치적 타협이나 절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원론은 정치를 정치적 상대와의 경쟁이 아니라 악마와 벌이는 생사투 곧 삶과 죽음을 가르는 투쟁으로 만든다.

셋째, 파악하기 어려운, 교조적 인식론을 채용한다. 교조적 인식론은 앞의 두 요소의 논리적 귀결이다. 순수하고 착한 우리 편의 곤경은 모두 전능한 악마가 벌인 공작의 결과다. 설령 우리 편이 실수하거나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 편에게 악의는 없다. 유능해 보이는 상대방의 모습에 현혹되면 안 된다. 이면에 감춰진 그들의 악마적 본성을 간파하고 폭로해야만 한다.

정치를 사생결단 투쟁으로 만들어

민주주의를 갉아먹거나(corrosive) 파괴하는 본래의 음모론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큰 도전이다. 그 영향력을 제어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도가 있을까? 내란 상태를 끝내고 권력의 공백을 빨리 채워 국가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숙제다. 그에 관해 내가 보탤 것은 없다. 음모론에 한정해서 말하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본래의 음모론에 대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존의 음모론 연구들은 음모론 대책을 크게 두 갈래로 구분한다. 개입의 시점과 대상의 차이다. 개입의 시점에 따라 ‘예방’과 ‘사후 조치’, 개입의 대상에 따라 ‘공급자’(음모론자)와 ‘소비자’로 나눌 수 있다. 양자를 교차하면 다음과 같이 4개의 셀이 만들어진다.〈표 참조〉

① 음모론 공급자의 소통 채널(SNS 계정)을 폐쇄함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 ② 법적인 처벌을 통해 사후적으로 음모론 공급을 제한할 수 있다. ③ 학교 교육을 통해 잠재적 소비자의 음모론 내성을 키울 수 있다. ④ 음모론에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도 있다. 각 대책은 나름의 강점과 한계를 지닌다. 가령 처벌이나 치료는 뚜렷한 목표를 제공하지만, 사후 조치의 한계(피해가 너무 커서 복구 불가능)가 있다. 그에 반해 격리나 교육은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지만, 현실성(무수한 계정 관리의 어려움)과 교육적 효과의 불확실성이라는 한계가 있다.

2025년 1월 2일 지금 필요한 음모론 대책은 뭘까?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하여 비상계엄을 실행했고 지금은 지지자를 선동하며 관저에서 농성하는 내란 피의자의 ‘격리와 처벌 그리고 치료’가 필요하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서강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했으며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대 문제, 음모론, 자기계발 붐 등에 주목하고 있다. 『음모론의 시대』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