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에 움텄던 국영의료론

2024-09-26

[문정주의 의료와 사회-6]

해마다 무더위와 함께 8월 15일이 와. 광복절을 뜻 깊게 보내는 방법을 각자 말해볼까? 나는 항일 투쟁에 목숨을 바친 분들, 일제의 전쟁터와 강제 노동에 끌려갔던 분들, 노예처럼 취급당했던 위안부 여성들을 가만히 머릿속에 떠올려. 그분들을 생각하고 오늘의 내 삶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뜻깊게 느껴져.

1945년 8월 15일은 그야말로 세상이 바뀐 날이었어. 그 며칠 전까지도 신문에는 일본 군대가 연합군의 함대를 침몰시키고 비행기를 격추했다는 보도가 가득했던 터라, 일제의 패망 소식에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했다고 해. 그러나 곧 해방을 실감하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며 기쁨을 누렸어.

해방된 우리 민족이 당면한 과제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어.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 했어. 의료 또한 마찬가지였어. 당시 조선인의 건강 문제에는 식민 통치 아래 고통받았던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어.

식민지 조선인의 건강

식민지 조선의 농민 건강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어. 1936년에 작성된 『경상남도 울산읍 달리(지금의 울산 남구 달동) 사회위생학적 조사』보고서야. 일본 은행계의 거물급 인사가 비용을 대고 행정 당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특별한 조사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중심으로 대학생 12명이 한 달 넘게 그곳에 머물면서 조사했어.

당시 농촌의 곤궁한 현실이 조사 결과에 드러나. 여성이 결혼하는 나이가 평균 17세고 가난할수록 일찍 결혼해. 경제적으로 상층 그룹의 가정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나이가 평균 18세, 중층에서는 17세, 하층에서는 16세야. 가난해서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어린 딸을 일찍 시집보냈다는 걸 보여줘. 반대로 남자는 형편이 어려우면 장가들기 어려워서 경제적 하층일수록 결혼이 늦어. 그런데 몇 세에 결혼하건 간에 그들에게 지워진 노동의 부담은 엄청났어. 임신한 여성의 90%가 해산하는 날까지 가사와 농사일을 했고, 해산 뒤에는 90%가 산후조리를 겨우 1주 이내로 할 뿐이었어. 해산한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고된 일을 다시 해야만 했던 거야.

식민 통치를 받게 된 뒤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어. 그걸 생생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아이들의 키야. 조사 시점에서 20년 전에 태어난 성인 남자는 일본 성인 남자보다 키가 컸지만, 아이들은 어떤 나이에서든 일본 아이들보다 작았어. 조사단이 밝혀낸 이유는 영양 불량으로, 먹을 것이 모자라 아이가 부모의 체격만큼 자라지 못하는 슬픈 현실이었어.

울산읍 달리에서 그랬다면 전국적으로는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전국적으로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보고서는 없어서, 사망 통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밖에 없어.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에 나와 있는 연도별 사망자 수, 월별 사망률을 관찰하는 거야. 통계는 1912년부터 나왔고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을 구분했어.

조선인의 사망률은 월별로 변화가 커. 3월과 4월, 다시 말해 춘궁기(봄에 식량이 바닥 나서 고통받는 때)에 사망률이 가장 높고 보리나 밀을 거둬들이는 여름이 되면 점차 감소해. 가을걷이 직후인 10월, 11월, 12월에는 사망률이 가장 낮아. 3월의 사망률이 11월의 사망률보다 두 배나 많은 거야. 이러한 월별 사망률의 차이는 식량 사정이 나빴다는 것을 보여줘. 봄이 되면 쌀이 바닥나고, 굶주려 죽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던 거야. 이와 같은 조선인의 사망률 패턴은 식민지 기간 내내 나타나.

쌀 생산이 부족했던 거냐고? 아니야. 일제에 쌀을 빼앗긴 거야. 식민지 초기부터 호남의 농경지를 일본인이 헐값에 사들여 지주가 되고, 조선 농민을 소작인으로 부려 쌀 생산량의 절반, 많게는 70%를 소작료로 내게 했어. 쌀은 군산항을 통해 실려 가 일본 국민의 식량이 되었어. 쌀 수탈이 해가 갈수록 심해져 조선 농민은 애써 농사를 짓고도 굶주려야 했어.

그런데 ‘조선 거주 일본인’의 사망률에는 춘궁기가 없어. 전반적으로 사망률이 조선인보다 훨씬 낮고 월별 변화는 거의 없어, 굶주리지 않았던 걸 알 수 있어. 실제로 조선에서 일본인은 주로 도시나 읍에 살고 높은 소득을 올리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소비했어. 반면에 조선인은 80%가 농민이고 그중 80%가 소작인으로, 풍족한 일본인과 가난한 조선인으로 나뉘던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사망률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식민지 조선의 의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선전한 것 중에 조선인에게 ‘의료 혜택’을 준다는 게 있었어. 일찍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자기들의 의학을 내세워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 한 거야. 일제가 을사늑약 후 2년 뒤인 1907년에 대한의원(훗날 총독부의원)을 세우고, 강제 합병 직전인 1909년에는 자혜의원이라는 관립(관청이 설립) 의료기관을 전주, 청주, 함흥에 세운 데는 그런 속셈이 있었어.

병원 설립과 함께 의료인을 양성해야 의료 혜택을 줄 수 있었겠지? 그러나 선전과 실제는 달랐어. 합병 후 1943년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 등에서 2,600여 명의 조선인 의사가 양성되기는 했어. 이천 명이 넘었으니, 숫자가 넉넉해 보인다고? 인구 비례로 봐야 해. 당시 조선 인구가 약 2,500만 명이므로 의사 1인당 인구는 거의 1만 명인 거야. 의사가 턱없이 부족했지. 반면 당시 일본은 의사 1인당 인구가 약 1천 명이었어. 조선에서 의사는 일본에서보다 열 배는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존재인 거야. 1만 명과 1천 명의 차이라니, 참말로 어이가 없어.

이 지경이 된 까닭은 우선 의학교가 부족한 데 있었어. 게다가 조선인이 의학교에 입학하는 길은 특히 더 바늘구멍이야. 세브란스 의전을 제외하고는 경성제대, 경성의전, 평양의전, 대구의전이 모두 관립으로 총독부의 통제 아래 있었는데 학생 선발시험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3:7로, 조선인을 차별해 적게 뽑았어. 일제는 조선에 있는 의학교에서조차 조선인 의사보다 일본인 의사를 양성하려 한 거지. 그런데 일본인은 의사가 된 뒤 대부분 일본, 만주, 중국 등으로 빠져나갔으니, 조선에는 의사가 희귀할 수밖에 없었어.

자혜의원 등 의료 현장에도 일본이 선전한 의료 혜택은 없었어. 일제는 1910년에 수원, 공주 등에 자혜의원을 세웠고 그 뒤로 조금씩 늘려 1940년대에는 전국에 46개 관립, 도립의원이 있었어. 그러나 모두 조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어. 너무 비쌌기 때문이야.

앞에서 보았듯이 조선인 대부분은 식량 부족에 시달릴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라, 돈 내고 의원(병원) 진료를 받는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어. 무료 진료도 했다지만 걸인과 같은 극빈자에게만 해당할 뿐이었어. 그러므로 일제가 조선인을 위해 세웠다는 관립, 도립의원은 사실상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을 위한 병원이었어.

바라는 것은 골고루 잘 사는 나라

우리 민족은 항일 의병, 3·1 만세운동을 비롯해 식민지 기간 전체에 걸쳐 줄기차게 항일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어갔어. 이제 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한 그때, 우리 민족이 바라는 나라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다행히 이에 관한 기록이 있어. 미군정청이 시행한 설문조사야.

먼저 산업 국유화에 관해서야. 1946년 3월에 서울과 주변 지역에서 조선인 2,600여 명에게 물었어. “주요 산업을 정부가 소유(국유화)하거나 정부가 통제”하는 데 대해 의견을 묻자, 찬성이 약 70%였어. 국유화나 정부 통제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답은 겨우 10% 정도로 적었어. 사업전문직, 노동자, 농민으로 그룹을 나눠서 응답받았는데 그룹 간에 차이가 거의 없었어.

다음으로는 선호하는 정치 체제에 관해서야. 1946년 7월에 서울에 사는 조선인에게 물었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 질문하자, 사회주의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좌파에서 64%, 우파에서 69%, 중도파에서 77%로 나왔어. 자본주의를 선호한다는 대답은 우파에서조차 겨우 25%로 나왔을 만큼 적었어.

놀랍지 않아? 해방 직후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가 산업 국유화를 찬성하고 사회주의를 선호해. 이 설문조사가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 미군정청이 실시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야. 1946년과 지금 사이에 놓인 세월이 생각 이상으로 긴 것일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당시 우리 민족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원했다는 사실이야. 일제의 지배 아래 당했던 착취와 차별, 그래서 견뎌야만 했던 가난과 굶주림과 모욕을 더는 겪지 않기를 바랐어. 대신에 정부가 주요 산업을 책임지는 나라에서, 돈이 있건 없건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에서 살고자 했어.

“의료를 국가가 기획하고 조직해야 한다.”

당시에 어떤 의료를 선호하는지 묻는 설문조사는 아쉽게도 없어. 그러나 앞서 살펴본 두 개 설문조사의 결과를 적용하면 의료에 대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어. 같이 해볼까? 답은 “국유화하거나 정부가 통제하는 의료, 돈이 없어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의료”라고 정리하면 되겠지? 줄여서 말하면 ‘국영의료’인 거야.

정리하고 보니 이 또한 놀라워.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의료의 방향이 ‘국영’이라는 것 말이야.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정당과 단체들이 내놓은 답변서가 보여줘.

1947년 여름,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미소(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어. 이 위원회가 국내 정당과 단체에 질문을 보내 답변을 요청했어. 질문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노동, 의료제도 등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어. 당시 우파와 좌파에 모두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있었는데 비슷한 성향을 지닌 집단끼리 뭉쳐 공동으로 답변서를 냈어.

우파든 좌파든, 의료를 사회화하고 국가가 운영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답했어. 첫째로 의료제도에 관해 우파는 ‘국가적으로 의료기관을 기획’해야 한다고 하고, 좌파는 ‘국립병원, 협동조합병원, 개인개업의 3종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했어. 둘째로 농어촌 의료에 관해 우파는 ‘전국에 도립병원뿐 아니라 군립병원을 세우고 보건소를 1개 면당 1개소씩’ 세워야 한다고 하고, 좌파는 ‘농촌에 협동조합병원을 세워 국영병원과 상호협조’ 해야 한다고 했어. 글귀에 쓴 표현만 다를 뿐, 국가가 전국 방방곡곡에 의료기관을 세워 골고루 이용하게 해야 한다는 방향에는 차이가 거의 없는 거야. 이걸 읽다 보면 몇 년 전, 경상남도 도립 진주의료원을 느닷없이 폐쇄한 우파 도지사가 생각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1947년의 우파는 21세기의 우파와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다만 차이가 있었던 것은 개인 개업과 의사 양성에 관해서야. 우파는 이에 관해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어. 그러나 좌파는 개인 개업의의 도시 집중을 방지해야 하고, 개업의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이를 분산시켜야 한다고 했어. 또한 의사를 많이 양성할 수 있게 학교를 증설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어.

중단된 논의를 이어갈 때

그러나 의료에 관한 이 의견들은 종이 위에 글자로만 남았어. 더 논의되지 못한 거야. 1947년 중반까지는 몇몇 월간지가 의료제도에 관한 논쟁을 싣기도 했어. 그렇지만 거기까지였어.

미국과 소련 간 관계가 급속히 협력이 아닌 대결로 바뀐 거야.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정부를 세우려 했던 미소 공동위원회는 깨졌어. 그때부터 미군정청은 남한에 ‘반공’ 정부를 세우고자 좌파를 탄압했어. 여기에 정당과 정치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이념을 빌미로 한 대립이 날로 커졌어. 그 대립이 폭력으로, 나아가 전쟁으로 이어졌지. 결국 우리는 일제에 가담했던 식민 세력을 제대로 청산하지도 못한 채 두 동강이 나고 말았어.

대립과 전쟁은 생활에 관한 실질적인 논의를 얼어붙게 했어. 의료 사회화도, 국가적인 의료 기획도 더는 화제에 오르지 못했어. 논의가 사라진 공간에서 의료는 정책과 제도가 아닌 시장에 맡겨져, 개업의의 도시 집중은 더 심해지고 의사 양성은 부족한 채로 굳어졌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의료 문제의 씨앗이 그때 이미 뿌려졌던 거야.

지금 이른바 의·정 갈등이 한창이야.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다는 정부 발표로 시작된 갈등이 반년이 넘어가도록 계속되고 있어. 그러나 1947년을 떠올려 보면 지금 갈등에는 정작 중요한 논의가 빠져 있어. 당시에 제기되었던 의료에 관한 국가적 기획, 병원에 관한 체계적 조직, 농어촌 의료를 위한 연결망은 아직도 없어. 이에 관해 논의를 기피하고 오래도록 문제를 방치했던 것이 지금 갈등의 뿌리가 되었어. 뿌리를 그대로 둔 채 갈등이 봉합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 77년 동안 중단된 논의를 이제라도 이어가야 해. 오늘의 갈등이 그걸 말해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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