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는 의대도 때려쳤다…전두환 '처가살이 8년' 이유

2024-09-25

추천! 더중플 - 전두환 비사

권력자가 되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가족과 친인척 관리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권력자 역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걸 우리는 지겹도록 목도했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문제적 인물 전두환을 탐구하는 시리즈 ‘전두환 비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8)입니다. 전두환은 집권 초반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친인척만큼은 예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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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전두환, 친가와 처가에 약했다

‘저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중략) 바로 밑 동생은 돈이 없어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 어린 제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모습을 충격과 눈물 속에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희동을 떠나 백담사로 향하면서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중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육군사관학교 생도 전두환이 이순자의 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가을부터였다. 이순자의 아버지 이규동 대령이 전쟁 중 경남 진해에서 개교한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이규동은 축구부장인 2학년 전두환이 마음에 들었다. 주말에 외출 나와도 마땅히 갈 데도 없던 전두환에게 ‘우리 집에 와 점심이나 먹어라’고 초대했다.

전두환은 육사 동기 12명을 이끌고 이규동 집을 찾아왔다. ‘계십니까’ 소리에 문을 열어준 여중생이 이순자였다. 전두환은 ‘점심 얻어먹으러 왔습니다’라며 앞장서 들어왔다. 점심 시간이 지난 무렵이라 참모장 부인은 따로 상을 차렸다. 전두환은 ‘다음 주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라며 떠났다. 전두환은 실제로 거의 매주 참모장 댁을 찾았다. 친구와 후배들을 이끌고.

전두환은 육사를 졸업한 이후에도 이규동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다 이순자가 이화여대 의대에 진학하자 결혼했다. 이순자는 ‘결혼한 여자는 다닐 수 없다’는 당시 이화여대 학칙에 따라 자퇴했다.

전두환은 결혼하면서부터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육군본부 경리감으로 별을 달게 된 장인 이규동은 서울로 올라와 가회동에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된 큰 집을 마련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처가살이를 다음과 같이설명했다.

‘그 견디기 어렵다는 처가살이를 8년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나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후원해 주신 장인, 장모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특히 장인 어른은 하나뿐인 욕실을 사용하는데 내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이른 새벽에 일어나 먼저 욕실을 사용한 뒤 말끔히 청소까지 해주시곤 했다. 사위가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처가 식구가 시집간 딸에게 업혀 사는 듯이 사위인 나에게 신경을 써주셨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대통령 전두환은 '어려운 친인척들 좀 도와주는 게 뭐가 나쁘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친인척에게 돈과 감투를 나눠줬다. 박정희의 냉정한 친인척 관리와 대조된다. 마침내 1982년 5월 로열패밀리 문제를 직격하는 초대형 폭탄이 터졌다.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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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이대 의대 때려쳤다…전두환 처가살이 8년 속사정

청와대 등에 업고 사기 친 장영자

장영자가 5공 권력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은 1980년 5·17 직후부터였다. 보안사는 ‘미모의 보살이 군부대를 돌면서 거금을 쾌척한다’는 정보에 주목했다. 혹시 ‘간첩이 아닌가’ 하는 대공 용의점에 내사를 했으나 특별한 혐의가 안 잡히자 각 부대에 ‘요주의 인물’이란 지휘서신을 보냈다.

장영자는 1980년 8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를 팔고 다니기 시작했다. 장영자의 형부가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이순자의 작은아버지)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다. 이런 혈연관계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뒤에 ‘청와대가 있다’고 과시했다.

그러다 어음 사기 사건이 터진 것은 1982년 4월. 수사 과정에서 장영자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미모의 보살, 군에 돈 뿌린다” 간첩? 전두환 처가 식구였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1982년 5월 22일 저녁 신군부 핵심들이 청와대 옆 안가(안전가옥)에 모였다. 전두환만 빼고. 결론은 ‘친인척의 공사 활동을 전면금지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용단을 촉구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누가 전두환에게 이런 건의를 전달하느냐’였다. 전두환의 성격이나, 친인척 문제의 민감성, 나아가 역모처럼 느껴질 이날 모임의 성격까지 고려하면 여간 난제가 아니었다. 좌중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후계자’ 노태우 내무장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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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비사: “이젠 각하라 불러”…5공 신군부 권력비사〉 주요 회차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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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오병상 칼럼니스트, 정리=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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