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5월 8일, 향년 79세로 타계하신 스승께서는 생전에 단언하신 바 있다. 문학의 본령은 깃발을 꽂는 데 있다고. 문학은 모든 예술 활동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후발대지만, 그 느림 속에서도 깃발을 꽂는 행위로 인간의 삶 한가운데 종지부를 찍는다고. 이후로도 삶은 이어지지만 그것은 변주일 뿐이라고. 그러니, 느리게 간다고 초조해할 필요 없고 빠르게 간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고.
스승의 단언에 오독이 없길 바라며, 청년 시절 고향 강릉을 떠나온 스승께서 환갑이 넘어 다시 찾은 뒤에 하신 말 또한 깃발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내, 내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고향 땅에 꽂았다.”
그 한마디가 닫힌 강의실 안을 감돌던 회환과 맞물려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뚜렷한 인과를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했었는지 모른다. 사신의 그림자가 언제쯤 어머니를 덮칠지 몰라, 마음 한구석이 불안으로 젖어 있던 날들이 많았으니.
새 정부 출범의 깃발이 오른 달에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책을 소개하자니 어딘지 어색하다. 그럼에도 시몬느 드 보부와르의 이 책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면은 이재명 정부와 공명한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3년 10월 24일 목요일 오후 4시.” 저자의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지고 병원에 옮겨진 다음 날, 대퇴골 골절 소식을 전화로 들은 시각이다. 어머니는 검사 중에 암이 발견되고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동안, 저자가 병원에서 어머니를 수발하며 느끼고 사유한 것들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끝내 타인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을 용서하는 것도 수발의 시간 속에서 비롯된다. 관찰과 사유의 문장이 자주 등장하며 마음과 시선을 붙잡는다. 밑줄을 긋고 그 여백에 저마다의 사유를 뻗어나가게 만드는 책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죽음과 돌봄에 대해 더 깊은 웅덩이를 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 후반에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스민다. 이를테면 192쪽에서 “엄마가 그 수요일 아침에 돌아가셨더라면 ~ 악몽과 슬픔 등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나 역시 치매에 걸린 어머니로 인해 겪은 긴 시간의 감정을 하나씩 떠올리게 한다. 193쪽 “엄마의 임종을 늦춤으로써 ~ ,”는 함께한 시간이 회한 없는 작별로 이어졌음을 드러낸다. 194쪽에서는 “공포와 고통과 싸워 얻은 승리를 통해 ~ 실상 엄마의 죽음은 비교적 편안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아주 편안한 죽음』은 수사적 미화가 아니라 정서적 실체와 가깝다. 집이 아닌 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가족의 손길을 느꼈기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저자의 어머니는 분명, 안도했다.
스승님의 말처럼, 문학은 결국 깃발을 꽂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 위에 언어의 깃발을 세워 사유를 이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죽음을 곁에서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제의다. 전체적으로 소설적 구성을 띠고 있지만, 회환이나 감정의 파동보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냉철하게 응시하려는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책은 죽음을 대하는 감정의 바닥을 관찰하는 동시에, 독자에게 불편하고 진실한 질문을 던진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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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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