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도저히 일 못해요…파리가 수천 마리는 있어요”

2024-10-14

나는 남겨진 것들에서 사연을 읽는 사람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유품정리사.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연을 옮기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럼에도 나는 왜 기록으로 남기는 걸까.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지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피하는 걸지도 모른다.

피한다고 겪지 않을 일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고독사의 고인과 주변의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의뢰인들이 처음부터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사실 나의 질문이란 건 이런 것들이다.

“고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주택의 종류가 무엇인가요? 몇 층인가요? 몇 평인가요? 고인의 성별과 연령대가 어떻게 될까요? 혹시 사인을 알 수 있을까요? 얼마 만에 발견됐는지 아시나요?…”

이런 딱딱한 질문이 계속된다. 사무적이고 긴 질문, 어떨 땐 상당 부분 잘 모르겠다는 대답, 그에 대한 회한과 자책. 아니 어떨 때는 짜증과 분노.

그런 질문과 대답의 끝에 사연이 쏟아질 때가 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단 한 문장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죄책감과 고통을 쏟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믿음의 말이 된다.

내가 듣고자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 위로의 말은, 당신이 말하고서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게 고인의 유품에도 다양한 사연이 존재하고 기록처럼 남겨진다.

그리고 내가 추측한 상황들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누군가는 병을 숨겼고, 빚을 숨겼으며, 상처를 숨긴 채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몰랐던 그 무엇을 그들은 내게 묻는다.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사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수많은 고민 끝의 마지막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 이야기를 전하는 건 먼저 간 사람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아무리 힘들었어도 살아냈어야 한다는 원망. 그런 감정들은 비워내고 온전하게 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만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번 사연도 그렇다.

30대 후반 남성은 사후 한 달 만에 발견됐다.

시설이 꽤 잘 갖춰져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의뢰인은 고인의 아버지였다.

“아들이 몇 년 전만 해도 IT계열 사업을 하면서 잘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회사는 문을 닫았죠. 그러더니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술을 먹으면 애가 변했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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