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화학 업체들이 위기에 몰린 기초화학 부문의 몸집을 축소시키고 있다. 올해 연말 인사에서 사업 담당 조직의 규모를 줄이는 것은 물론 담당 임원의 직위를 한 단계씩 강등하는 등 사업조직 전반에 찬바람이 부는 모습이다. 에틸렌 등 기초화학사업은 중국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첨단소재 중심으로 체질 개선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4일 화학 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011170)은 최근 정기 임원 인사에서 이영준 전 첨단소재사업 대표이사를 화학군 총괄대표와 기초소재사업 대표이사를 겸임하도록 했다. 롯데케미칼이 기초화학사업 대표이사를 별도로 두지 않고 화학군 총괄대표가 겸임하도록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석유화학 ‘투톱’인 LG화학(051910) 역시 노국래 석유화학본부장(부사장)의 후임으로 김상민 전무를 임명하면서 본부장의 직급을 한 단계 낮췄다. 석유화학본부장에 전무급을 임명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LG화학은 석유화학‧첨단소재사업본부장 등 주요 본부의 리더로 항상 부사장급을 선임해왔다.
석유화학 업체들이 잇달아 기초화학 사업을 이끄는 리더십을 강등한 것은 첨단소재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 하려는 의지로 풀이된다. 기초화학 부문의 업황이 회복되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조직을 축소하고 개편해 첨단소재 부문으로 화학 사업의 추를 옮기겠다는 것이다. 앞서 롯데케미칼은 60%에 달하는 기초화학 매출 비중을 2030년까지 30% 이하로 낮추고 첨단소재‧정밀화학‧수소에너지 등의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국내 업체들은 ‘화학의 쌀’인 에틸렌 등 기초화학 제품을 생산해 중국 등의 국가에 수출해왔다. 하지만 중국이 빠른 속도로 에틸렌 등 기초화학 설비를 갖추며 자급률을 높이자 국내 업체들은 최대 수출 시장을 잃었고 중국에서도 공급이 과잉되기 시작하면서 기초화학 부문의 업황은 수직 추락했다.
업계에서는 이미 중국의 에틸렌과 프로필렌 자급률이 100%를 넘어섰고 폴리프로필렌(PP) 등 합성수지의 자급률 역시 80% 수준까지 상승했다고 보고 있다.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원료인 나프타를 뺀 가격)는 올해 3분기 기준 톤당 186.47달러에 머무르면서 2022년 이후로는 손익분기점인 300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국내 화학업체들은 일부 공장의 생산라인을 멈추는 등 수익성을 개선하고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기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이달 2일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1~3공장 중 2공장의 에틸렌글리콜(EG) 등 생산라인을 멈춰 세웠다. LG화학 역시 나주공장의 알코올 생산라인 중단을 결정하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재배치 관련 설명회를 진행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주로 수출하던 중국이 자급률을 끌어올리면서 수출길이 막혔고 수출할 만한 시장을 찾지 못했다”며 “중국의 저가 공세까지 겹치며 제품을 만들수록 손해인 상황이 이어지면서 업체들이 포트폴리오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일각에서는 정부가 산업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삼일PwC는 이날 ‘위기의 K석유화학, 팀 코리아로 돌파하라’는 보고서를 내고 “한국은 세계 4위 화학 산업 강국이지만 현재 기술력과 생산이 범용 제품에 집중돼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수와 대산 등에 위치한 나프타분해설비(NCC)의 운영 주체를 1~2개로 압축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설비를 폐쇄‧매각해 채산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는 기본 방침만 정해놓고 실행만 민간에 맡긴다면 기업들은 버티기에 나서면서 구조조정 시간이 지체될 공산이 커 특별법 제정 등 파격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