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졸작, 졸필이라는 겸손함

2024-09-06

문인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이다”라는 말, 이 말이 정말이라면 문인 중에는 살찐 사람이 없어야 한다. 계속 깎아대는데 언제 살찔 새가 있나….

졸작, 졸필, 졸저(拙著)라는 낱말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졸작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턱없이 모자라는 졸필로 책을 내려니 부끄러움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 겸양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멋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읽어도 그저 습관적인 멋 부리기 관용어로만 읽힌다. 왜냐하면 정말로 졸작, 졸필이라고 생각한다면 발표하지 않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졸작, 졸필, 졸저를 내놓아 세상을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냉엄하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쓴이가 자신 없이 주저주저 머뭇거리면, 읽는 이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자신 없이 우물거리는 말에 설득당할 독자는 없다. 그야말로, 영혼을 불태운 글인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쓴 글인지 독자는 금방 알아챈다. 믿음 없이 미사여구만 나열하는 기도나 마음 없이 대충 부르는 노래는 맥없이 허공을 맴돌다 스러진다.

그래서 나는 졸저, 졸필, 졸저 같은 낱말은 되도록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물건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나 같은 ‘생계형 글쟁이’는 쓰임새에 맞는 글을 마감 날짜 넘기지 않고 쓰면 그만이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의 경우는 그럴 수 없다. 끝도 없고 완성도 없다. 천하의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완성된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림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이제 완성이다’ 하고 중얼거렸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작품을 완성한다, 그림을 마무리 짓는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피카소 선생의 말씀대로 완성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참으로 정직했는가와 같은 자기 내면의 문제들일 것이다.

졸작이냐 걸작이냐,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작가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평가는 독자나 평론가, 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니, 작가가 나서서 미리부터 졸작, 졸필이라서 부끄럽다고 고개 숙이며 접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다고 졸작이 명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발표하면서 더 잘 쓰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문인도 많다. ‘광장’의 최인훈처럼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줄기차게 다시 읽고 고치는 작가도 있고, 카프카처럼 세상을 떠나면서 친구에게 자기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부탁한 작가도 있다.

한편,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평생 책을 내지 않은 문인도 있다. 김병현 시인이 그런 분이었다. 안타깝게 여긴 후배들이 뜻을 모아 유고시집을 내드렸다. 우리 남가주 문단에도 벌써 책을 내야 했는데, 아직 안 내는 실력파 중견 문인들이 적지 않다. 저마다 사정이야 다르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엄격함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런 분들의 겸손을 대하면 겁 없이 책을 많이 낸 내가 면구스러워지곤 한다.

나의 스승 김희창 선생님께서 주신 말씀을 되새긴다. “예술 앞에는 가장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는 가장 오만해야 합니다. 오만해야 붓을 들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해야 좋은 예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졸필’ 끝!!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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