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홀리다…자개장의 반가운 부활

2025-04-04

애물단지? 보물단지!

‘자개장’의 재발견

제주에서 태어난 애순이와 관식이의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매력에 ‘폭싹’ 빠진 요즘이다. 찰진 대사만큼이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 것은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 하나하나였다.

그중에 단연 눈에 띄는 건 자개장이다. “쨍쨍하던 여름날 같아서 붙박이장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버리지 못했다”는 대사처럼 자개장은 단순한 가구를 넘어 누군가의 여름 한 조각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당차고 요망 졌던’ 혼수품

과거 잘게 썬 조개껍데기를 이어붙여 영롱한 광택을 낸 자개장롱은 결혼을 앞둔 여성의 로망이었다. 빛나는 자개의 무늬는 장수와 부귀를 상징하는 십장생과 모란으로 장식되었고 한편엔 두툼한 솜이불, 가지런히 걸어둔 옷가지, 꽁꽁 싸매었지만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귀중품을 품은 자개장은 곧 ‘엄마의 창고’이자 ‘시대의 멋’이었다.

주부 박미선씨(72)는 자개장을 ‘인생의 첫 사치’라고 표현했다. 박씨는 “자개장을 들이던 날의 벅참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햇살이 닿아 반짝이는 자개 앞을 떠다니는 먼지마저 아름답게 보였다”고 회상했다.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부터 부를 몰고 온다는 모란문까지 각기 다른 문양이 새겨진 시커먼 자개장은 정교한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특히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명품’ 자개장은 수백만원부터 수천만원을 호가하며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덕분에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자개장롱은 최고의 혼수품으로 꼽혔다. 그중 으뜸으로 여겨진 것은 나전칠기 자개장롱이었다.

비교적 형편이 여유로운 집에서는 장롱과 함께 삼층장, 문갑, 화장대, 그릇장을 구비하기도 했다. 곗돈을 모아 살 만큼 ‘선망의 가구’였던 자개장의 판도가 바뀐 것은 장인의 손이 깃든 까만 옻칠을 대신할 새로운 도료가 등장하면서다. 황경선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 많던 자개장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활용한 코팅재 포마이카를 가구 표면에 바르면 자개장처럼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면서 가격은 자개장보다 저렴해 인기를 끌었다”고 기록했다.

‘문짝만 빛나는 자개장롱’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포마이카 자개장의 인기는 한동안 유지됐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40년째 가구점을 운영 중인 김진수 대표는 “경제 성장과 함께 빠르게 확산된 중산층에 포마이카 자개장은 적당한 구매력을 과시할 수 있는 대체품이었다. 또한 자신의 세련미를 드러내는 도구였다”고 풀이했다.

다시, 빛나는 자개장

영원할 것 같았던 자개장의 위엄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불어온 아파트 붐, 주거 형태의 변화와 함께 기울었다. 인스턴스 가구와 붙박이장의 기세에 자개장의 가치는 무의미해졌고 급기야 ‘헐값에도 팔리지 않는 애물단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희소성 높은 자개장들도 이 시기, 쓰레기로 버려졌다.

‘시대극 소품’으로 전락했던 자개장이 부활한 것은 MZ세대를 중심으로 번진 ‘레트로’ 문화가 소비 전반에 나타나면서다. ‘핫플’로 불리는 상수동이나 익선동에는 자개장을 이용한 카페와 음식점이 등장했고 자개 가구만을 비치한 부티크 호텔도 생겼다.

최근에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하는 자개장이 재조명되는 모양새다. 리폼 업체를 운영 중인 최정화 대표는 “젊은 부부들의 의뢰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화장대, TV장, 식탁 등 실용성을 강조한 제품으로 리폼을 요청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SNS와 유튜브에서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개장을 고쳐 쓰는 이들의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구리선과 단추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 구남희씨(가명)는 시댁 어른들이 사용하던 자개장에 별도 제작한 다리를 붙여 화장대로 사용 중이다. 구씨는 “단조로운 ‘요즘 인테리어’에 수작업 된 자개들이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것 같다”며 “단순한 외형과 강렬한 옻칠에 대비되는 섬세함이 자개장의 매력”이고 했다.

주택살이 중인 장영진씨 역시 3층 옥탑방을 자개 가구로 꾸몄다. 장씨는 “자개는 화려하면서도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멋이 묻어나는 개성이 뚜렷한 존재다. 또한 각도에 따라 은빛이 되기도 핑크빛이 되기도 청록빛이 되기도 한다. 정의할 수 없는 빛깔이 자개의 매력”이라고 극찬했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개장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들에게 자개장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세월을 관통하는 아이템이다. 김희수 인테리어 전문가는 “자개장은 고유의 질감과 그 위에 쌓인 세월과 이야기가 깃든 문화유산이다. 색다른 디자인과의 결합을 통해 더 큰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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