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학쟁이’와 ‘빨갱이’

2024-10-02

다산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이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출발한 날이 1783년 음력 10월 14일이었다. 그해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여 친구 이벽(李檗)의 부탁을 실행했다. 북당(北堂)의 성당을 찾아가 신부를 만나며 천주교에 입교한다. 이승훈은 필담으로 신부에게 교리를 배웠고 40여 일 동안 머물며 북당 신부인 프랑스인 장 그라몽(중국명 梁棟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승훈은 천주교 교리서, 성구(聖具) 및 관계 서적 등을 가지고 1784년 3월 24일 귀국했다.

한때 천주교 관심 가졌던 다산

신해옥사 계기로 종교와 결별

그래도 끈질기게 붙었던 모함

‘이념 딱지’ 악습 이젠 없어져야

정적으로부터 다산 보호했던 정종

그런 임무를 맡겼던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천주교를 연구했고, 그해 9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해 4월 15일은 다산의 큰 형수(이벽의 누나)의 제삿날, 이벽은 다산 형제들에게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 하루 전에 마재(馬峴,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방문한다. 제사를 마친 15일, 이벽은 정약전·약용과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배 안에서 천주교 책들을 두 형제에게 읽도록 했다. 책을 읽자마자 다산은 “천지조화의 시초,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를 읽자 황홀감과 놀라움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얼마 동안 신자로서의 행동을 했었다.

1784년 겨울 수표교에 살던 이벽은 천주교 집회를 열며 마침내 조선에 천주교가 창시되는 일을 해냈다. 그러나 이벽은 다음 해에 병사하고, 그의 역할은 다산의 형 정약종이 이어받았다. 정약종은 교세 확장에 열을 올리며 명도회(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 조직) 회장으로 활동했다. 다산이 이벽과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에 관여하던 때는 어진 임금 정조의 시대였다. 반대파들이 다산을 ‘천주학쟁이’라고 온갖 비방과 모함을 일삼았지만, 1791년 신해옥사 이후 종교와 결별한 다산을 정조가 믿고 등용했던 까닭에 이런 모함과 비방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쟁이’ 누명을 쓴 다산은 정치적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18년의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독재 시대에 ‘빨갱이’라는 모함과 비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형당했거나 옥고를 치렀던 분들과 어쩌면 그렇게 같은 처지일 수 있단 말인가.

올해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정치가 중 한 명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지난겨울에는 김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세 분의 정치와 철학에 관해 토론하는 학회가 열리기도 했다. 독재와 불의에 싸우며 투옥과 망명을 통해 집권한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고, 또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이 돌아갔다. 분단국가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 30년 군사독재 시절,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 ‘빨갱이’로 몰아대는 방법이었다. 유신정권과 5공 정권 내내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비방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던가.

다산이 한때 천주교와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천주학쟁이’라는 비난에 못 견디다 끝내는 정조에게 상소를 올려 “한때 천주교에 관계했던 것은 사실이나, 진즉 마음을 끊었다”고 아뢰어 정조의 확인을 받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반대파들은 끝까지 죽이고야 말겠다며 비난을 계속했다. 오늘까지도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대중 또한 가짜 뉴스가 횡행하다 보니 정치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조차도 그의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5년 동안의 대통령 임무를 마친 지 한참이나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런 모욕적 비난과 의심이 완전히 가셨다고는 하기 힘들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가짜 뉴스가 진실의 가면을 쓰고 오랫동안 반대파를 탄압하는 구실을 하는 것인가.

‘이념 딱지’ 붙이려는 유혹

분단국가 상황에서 정치적 위기를 맞으면 이념 논쟁이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집권 세력의 믿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6·25를 겪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여건에서 ‘빨갱이’는 가장 증오하는 세력이었다. 유교 국가에서는 제사를 폐한다는 이유로 천주교가 가장 혐오 받던 종교였다. 그런 이유로 독재자나 보수세력은 각각 ‘빨갱이’와 ‘천주학쟁이’를 과대 선전하여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유혹을 버리지 못했다.

국정운영 긍정 평가가 20%대로 떨어진 요즘, 정치권 일각에서 “공산 전체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등의 발언이 다시 나오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권력 비판 세력에 대한 공격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다산을 천주학쟁이로 몰던 200년 전의 낡은 수법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적 경험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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