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에 산다니, 고디바 같은 초콜릿을 매일 드시겠어요?”
한국에 갈 때마다 듣는 단골 질문이다. 백화점 진열대에서 반짝이는 벨기에 초콜릿 덕분인지, 여기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처럼 비치는 모양이다. 하지만 파리에 산다고 매일 아침 크루아상을 우아하게 베어 물진 않듯, 벨기에 사람들도 매번 고급 초콜릿을 먹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이미지를 부정하진 않는다. “매일은 아니에요…” 하고 살짝 뉘앙스를 조율하는 정도. 때로는 그 오해마저 달콤할 때가 있어, 이 정도로 조용히 내적 타협을 본다.
맛은 취향의 영역이라지만, 벨기에 초콜릿의 깊고 부드러운 풍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벨기에가 세계적인 초콜릿 강국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 식민지 시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당시 벨기에는 콩고에서 카카오를 값싸게 대량으로 공급받았고, 이를 정교한 가공 기술로 처리해 유럽 상류층을 매혹한 것. 이렇게 초콜릿은 화려한 포장 뒤에 그림자처럼 어두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에서 초콜릿은 ‘일상’이다. ‘있으면 좋은 간식’이 아니라 ‘없으면 허전한 필수품’ 같은 존재다. 커피 옆에서, 점심 후에, 당이 떨어질 때, 혹은 그냥 눈앞에서 반짝일 때!?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늘 초콜릿이 있다.
그 일상이 더 빛을 바라는 시점은 한국 방문 때다. 지인들 선물용으로 캐리어에 테트리스 하듯 초콜릿을 채워가는데, 그것은 ‘가성비’ 좋은 초콜릿이다. 그런데 한국 땅을 밟는 순간, 백화점 VIP 대접을 받는다. 고디바와 자연스레 비교당하며 속으로 슬쩍 움츠러드는 건 덤. “벨기에 사람들이 평소에 먹는 초콜릿이에요”라고 설명해도, 선물을 받은 이들의 감탄과 호탕한 대접 속에 괜히 쑥스러워진다. 역시 ‘공짜 고급 이미지’ 유지비는 만만치 않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콜릿이 특별 대우를 받는 건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우리 집 역시 그러하다. 그 ‘특별 대우’의 중심에는 늘 시어머니가 계셨다. 네 아이를 키워낸 베테랑이자 전직 요리사인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에 대한 존중이 남다른 분이다. “네 남편은 내 아들이지만, 네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잖니. 아무리 손자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순 없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아이들에게 단것을 많이 주지 않는 내 방침을 잘 아셨지만, 초콜릿 앞에서는 언제나 예외였다. 말을 막 배우던 손자가 포동포동한 손으로 “하나 더!”를 외치면, 내 앞에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셔도 뒤에서 몰래 하나 더 쥐여주곤 하셨던 것. 사춘기 아들 방 서랍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초콜릿 포장지를 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이의 단것 먹는 습관은 오래전 시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쌓아온 은밀한 공모로 시작되었음을.
한국 식탁은 ‘무엇을 먹느냐’, 영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벨기에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아이가 혼자 씩씩하게 잘 먹고 나면 어머니가 보상처럼, 혹은 그저 사랑스러워 초콜릿을 하나씩 쥐여주셨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도 겁 없이 몇개씩 집어먹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이 심란함도 결국 내 몫이구나 싶다.
옛 벨기에 초콜릿엔 식민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우리 집 식탁 위 초콜릿은 애정의 언어이다. 아이와 시어머니는 비밀스러운 동맹을, 아이와 나는 여전히 쫓고 쫓는 ‘밀당’ 중이다. 초콜릿 하나에 이렇게 많은 감정이 담길 줄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도 벨기에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쥐여주고, 숨기고, 들키고… 이 달콤씁쓸한 초콜릿 눈치 싸움, 나는 언제쯤 끝내려나!
■최윤정

‘부르주아’라는 성을 물려준 셰프 출신 시어머니의 자취를 좇으며 현재 벨기에에서 여행과 요리를 엮어내는 팝업 레스토랑 ‘tour-tour’를 기획·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