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좋은’ 대신 ‘고용친화적’ 지칭 등
어려운 단어 많아 유권자 입장서 거부감
獨·네덜란드 선관위 ‘쉬운 공약집’ 제공
호주선 ‘쉬운 언어’ 버전 등 별도로 제작
주요 후보들 공약집 발표 지연도 문제
“시민이 공약 이해해야 정책 관심 가져”

‘고용친화적 환경 조성으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 기반 조성’, ‘직원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좋은 일자리를 늘릴게요’.
두 문장은 같은 취지의 공약이다. 앞선 문장은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발표한 10대 공약이며 다음 문장은 이를 쉬운 정보로 바꾼 말이다. 선거 공약은 투표권을 처음 얻은 만 18세 청년부터 직장인은 물론 노인까지 다양한 유권자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유권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반감된다. 정치인의 대국민 약속인 공약이 우리 삶에서 멀어진 이유 중 하나다.
◆길고 어려워 눈길 안 가는 공약집
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집은 194쪽, 국민의힘은 174쪽, 정의당은 191쪽이었다. 평균적인 성인의 읽기 속도는 분당 250단어 정도. 페이지당 약 300단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후보자 세 명의 공약집을 읽는 데만 이론적으로 약 11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대다수 유권자가 제대로 읽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경남 창원에서 만난 박사과정 준비생 김민재(28)씨는 35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읽은 것은 전공책을 공부할 때뿐이라고 말했다. 유튜브 채널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강승민(26)씨 역시 “공약집은 ‘시성비(시간 대비 가성비)’가 없다. 그 긴 공약집을 어떻게 다 보느냐”라며 “기사를 읽어도 충분히 판가름할 수 있는데, 긴 공약집을 보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공약집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를 만날 때가 많지만, 설명은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용어나 약어도 별다른 설명 없이 실린다. 16대 대선 공약집에는 ‘GNP’, 20대 공약집에는 ‘IAEA’라고만 표기돼 있다. 개념 설명은 물론 국민총생산(GNP), 국제원자력기구(IAEA)라고 풀어쓰지 않는다. 김씨는 “(GNP와 IAEA는) 들어본 말이지만 헷갈린다”며 “공약집을 살펴보면 지방교부세(자치단체 간 재정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국세 중 일정액을 나눠주는 금액) 같은 용어가 설명 없이 나온다. 일반 유권자 입장에서는 모를 만한 단어가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최근 유권자는 종이책보다는 디지털 기기로 정보를 접하지만 공약은 여전히 과거 형식 속에 갇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발표한 통계자료를 보면 2023년 성인의 종합독서율은 43.0%로, 1994년 첫 조사(86.8%) 이래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성인의 종이책 독서율도 조사를 시작한 2013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하락세다.
종이책에서 잘 읽히는 글과 스마트폰에서 잘 읽히는 글은 다르다. 하지만 스마트폰에서 더 잘 읽히는 방식으로 공약집이 개발되지 않고 있다. 주요 정당 후보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인쇄용으로 만든 책자형 선거공보와 예비 후보자 홍보물이 그대로 올라만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영국·호주 등 ‘쉬운 공약집’ 공개
호주는 전문가들이 ‘쉬운 정보 선진국’으로 꼽는 나라다. 호주에서는 모든 정보를 세 가지 버전으로 만든다. 기본적인 정보가 담긴 원문과, 글을 읽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쉬운 언어(Plain Language)’, 그리고 발달장애인 등 정보를 알기 어려운 정보 약자를 위한 ‘잘 읽히는 정보(Easy to Read)’를 각각 제공한다. 영국에서는 주요 정당이 쉬운 공약집을 자발적으로 발간한다.
정보는 읽혀야 의미가 있다. 유권자들이 읽고 싶은 쉬운 공약집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호주처럼 해외에선 선거 관련 정보를 제공할 때 다양한 유권자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정보를 따로 공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유권자가 정보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다.
전북 익산에서 만난 대학원생 강건(28)씨는 “대중 정당이라면 다양한 유권자의 수요를 모두 맞춰야 한다. 장애인이든, 저학력층이든,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선거관리위원회는 세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쉬운 공약집을 유권자에게 제공한다고 답변했다. 네덜란드는 ‘모두를 위한 정치’ 지침을 마련했다. 정당이 주요 정책과 선거 홍보자료를 쉬운 정보와 수어, 음성으로 제공하도록 한다. 네덜란드 선관위 관계자는 “내무부가 주도하는 정부 이니셔티브 ‘투표 접근성 강화’는 각 정당이 전문가들과 협력해 이해하기 쉬운 정책과 선거 홍보자료를 제작하도록 장려한다”며 “정부는 추가로 유권자들이 쉽게 공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일 연방선관위 관계자 역시 “선거 절차와 역할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해서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독일 선관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어려운 단어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다. 밑줄 친 단어를 누르면 바로 국어사전 링크로 연결된다. 광주에서 만난 손어진(39)씨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20대 총선거가 있었다. 독일 정당도 수백 페이지로 공약집을 빽빽하게 발간하더라”며 “동시에 쉬운 언어로 된 얇고 그림이 들어간 공약집도 같이 낸다”고 전했다.
김경양 서울시 장애인의사소통권리증진센터장은 “호주나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히 국가가 인지 정도와 장애 정도에 상관없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국도 이런 보편적인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쉬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쉬운 공약집 발목 잡는 일정과 예산
쉬운 공약집을 만들기 위해선 공약이 빨리 발표돼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선거일 15일 전, 국민의힘 후보였던 윤석열 전 대통령은 13일 전에야 공약집을 발표했다. 사실상 쉬운 공약집을 만들기에는 촉박한 일정이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의 백정연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제작에 매달려 5일 만에 겨우 주요 후보의 쉬운 10대 공약집을 완성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발달장애인 유권자가 주요 후보의 공약집을 세밀하게 살펴보기는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소소한소통은 이번 대선 후보의 쉬운 10대 공약도 26일 공개했다. 한 달 사이 평균 지지율 5% 이상인 후보 등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TV토론회 후보 초청 기준에 따라 이재명·김문수·이준석·권영국 후보의 공약을 쉬운 표현으로 바꿨다. 또 공약을 낸 배경을 설명해 유권자가 공약 의도까지 파악하도록 했다. 백 대표는 “발달장애인을 비롯해 곧 투표권을 갖게 될 청소년, 정치를 어려워하는 비장애인 유권자 모두가 대상”이라며 “공약을 이해하고 정치 참여의 진입 장벽을 낮출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 공약집 발표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 선관위는 2016년 유권자의 알권리 보장과 정책선거 실현을 위한 공약개발을 위해 기존 선거일 전 24일부터였던 후보자등록 신청일을 선거일 전 40일부터로 개정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하지만 국회는 구체적인 논의를 하지 않았고, 결국 법 개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쉬운 공약집을 위한 별도 예산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 입장에선 평소에 내던 공약집 예산을 줄여서 남은 돈으로 쉬운 공약집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김 센터장은 “정치인이 선거 자금 중 일부를 쉬운 공약을 만드는 데 쓰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며 “그렇게 하려고 해도 선거법 안에 공보용으로는 얼마를 써야 하는지 한계가 있어서 쉬운 공약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공동기획 : 공공의창, 한국정당학회
매니페스토취재팀=조병욱·장민주·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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