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아버지 작업장에 갈 때면 입구까지 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털복이가 어떻게 알고 펄쩍펄쩍 뛰어서 내가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내 차는 픽업트럭이라 소리가 큰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털복이의 반응은 항상 기특했다.
친하게 지내던 교수가 서초동 캣맘으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정 무렵에 뭔가를 주섬주섬 담아서 나간다. 몇 번 따라 나가본 적이 있다. 사료와 물과 햇반 그릇을 어딘가에 놓으면서 전에 놓았던 걸 갈아주고 이름을 불렀다. 여기저기서 고양이들이 경계심 없이 나타났다. 고양이들은 대체로 못생겼고 병에 걸리거나 장애인 놈들도 있었지만 귀여웠다. 그 교수는 고양이에 따라 건식 사료를 주기도 했고 습식 사료를 주기도 했다.
습식 사료를 알뜰하게 긁어서 주는 모양새가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뭐랄까,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보였다. 떠먹는 요구르트의 작은 숟가락으로 신중하게 캔 바닥까지 깨끗하게 긁어내는 모습이 굉장히 ‘있어’ 보였다. 울산에 온 후 털복이를 보러 갈 때마다 습식 사료를 사 갔고 그 교수처럼 사료를 간식인 양 줬다. 털복이와 짤복이는 알루미늄 그릇까지 씹어먹을 기세였다. 짤복이를 누가 훔쳐 간 뒤에도 털복이에게 습식 사료를 가져다줬다.
그래서 털복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까망이도 데리고 왔을 때 두 놈을 위해 맛있는 사료를 준다는 게 습식 캔이었다. 혼자 살기에는 신발장이 컸다. 신발장을 세로로 삼등분을 했을 때 30퍼센트 정도를 습식 사료로 가득 채웠다. 엄청난 양이었다. 문제는 강아지가 똑같은 걸 계속 주면 거부한다는 사실을 몰랐었고, 내 개들은 같은 걸 연달아 주면 네댓 번째엔 입도 안 댄다는 걸 몰랐다.
단독주택으로 오기 전 내가 개 키우는 걸 공부한 곳은 웹툰이었다. 의무적으로 보던 웹툰의 수많은 소재 중 하나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학습하게 된 거다.
하나는 개와 고양이를 열 마리 정도 키우면서 웹툰 소재로 쓰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과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작가가 쓰는 웹툰은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다음으로 본 웹툰은 개를 싫어하는 웹툰 작가가 어쩌다 개를 키우게 됐고, 육아하듯이 개를 키웠으며, 주위에는 개를 키우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내용이었는데, 꽤 괜찮더니 여느 연재물의 수렁처럼 질질 끄는 모양새가 불편해 끊었다. 그리고 돈 밝히는 수의사가 어느 날 갑자기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면서 동물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는 웹툰이었는데, 나름 필요에 따라 웹툰을 오랫동안 봐 오던 것이라 웹툰 자체를 끊으며 함께 덮었다.
전문 정보를 포함한 온라인의 글들은 대개 광고성이 강했고, 자본주의 육아의 과소비 유도와 같은 패턴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 한 웹툰은 처음엔 호기심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역시 광고처럼 개를 키울 때 과잉 소비를 하지 않으면 나쁜 주인인 양 취급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졌다. 그래도 도움이 된 부분도 있다. 일개인이 얼마나 걸러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처음엔 두 마리 모두 아무거나 줘도 다 잘 먹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자주 먹기를 거부했다.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수의사 웹툰에서 사료를 먹지 않는 강아지가 도대체 똑같은 걸 몇 년이나 먹이는 거야! 라고 하는 모습에 난 깨달음을 가졌다. 비싸고 맛있다는 그 습식 사료를 내 개들이 안 먹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작업장에서 저렴한 대용량 건식 사료를 먹던 털복이는 어쩌다 한 번씩 내가 주는 특식을 좋아했다. 묶어 뒀던 털복이에게 매일 사료를 줄 수 없으니 한 번에 가득 부어두곤 했었는데 추울 때를 제외하곤 무슨 방법을 써도 사료에 개미가 들끓었다. 아버지는 커다란 짙은 붉은색의 플라스틱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넣어서 사료를 담았다. 개미는 거대한 저수지를 줄지어 건넜고 털복이 사료를 점령했다. 개미는 먹을 걸 가리지 않는다. 플라스틱이나 비닐만 아니면 되는 것 같다. 그 징글징글한 개미를 본 이후로 난 개미를 싫어하게 됐다.
어쨌든 집으로 오면서 털복이는 목줄을 풀었고, 특식으로 먹던 사료를 매일 먹을 수 있게 됐는데 입에 대지도 않을 때 화부터 났다. 내가 이만큼 해주는데 왜 넌 받아들이지 않냐. 넌 왜 내 호의를 거부하는 거냐. 그래, 주는 내가 마음이 편하면 뭣하나. 받는 놈이 불편하다는데. 그게 내가 널 미워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주려면 원하는 걸 줘야지. 필요한 걸 줘야지.
(623호에 계속)
이민정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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