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서 모(35) 씨는 이달 내내 주 3~4회 저녁 약속이 잡혀있는 상태다. 부문ㆍ파트ㆍ팀ㆍ입사동기 모임 등 직장 내 송년 행사가 가장 많고, 친구ㆍ가족 모임도 예정 돼 있다. 서씨는 “연말 모임은 술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라며 “술에 약한 편이라 숙취해소제를 대량으로 사놨다”라고 말했다. 그는 “연말마다 술 때문에 지친다. 다음날 몸이 너무 힘들고 건강 상하는게 느껴진다”라며 “말로는 ‘원하는 사람만 마셔라’하지만 막상 돌아가며 건배사를 하고, 원샷을 하는 분위기라 폭음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음주 문화가 갈수록 개선되는 추세라지만 여전히 연말연시가 되면 서 씨처럼 술자리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9일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 따르면 국내 음주 인구는 2500만명(최근 1년간 한 달에 한 번 이상 음주한 성인)에 달한다. 과거 ‘남자는 하루 두 잔, 여자는 하루 한 잔’ 음주를 해도 건강에 해롭지 않다거나, 한 두잔의 술은 심장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속설도 있지만 의학적으로 소량의 음주도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이 확인된 지 오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적정음주량은 ‘제로(0)’라고 선언했다.
오범조 서울시보라매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WHO가 알코올은 1군 발암물질이라고 규정했지만, 아직도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한 두잔 술은 혈액 순환에 좋다’는 식의 잘못된 정보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지적했다. 술은 구강암, 인두암, 후두암, 식도암, 간암, 유방암, 대장암 등의 원인이다. 하루에 50g(5잔가량)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암 발생 위험이 4배까지 증가한다. 또 간질환, 관상동맥, 심장질환, 뇌졸중 위험을 끌어올린다. 폭음하는 경우에 급성알코올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오 교수는 “대학 신입생, 사회 초년병 등이 자기 주량을 잘 모르는 이들이 폭음을 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라며 “과하게 술을 마시면 호흡과 심장 박동을 제어하는 뇌 부위가 마비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술로 인한 사회적 폐해도 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음주의 사회경제적 비용은 15조806억원이다. 2015년의 13조4212억원보다 12.4% 늘었다. 또 최근 5년간(2019년~2023년) 발생한 음주운전 교통사고는 총 7만 5950건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하루에 약 35건의 음주운전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술자리가 늘어나는 12월에 급증한다. 음주 운전은 운전자 본인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위협한다.
전문가들은 피치 못하게 술을 마셔야 한다면 조금씩 나눠 천천히 적게 마시라고 권고한다. 한 번에 술을 들이켜는 원샷은 혈중알코올농도를 급격히 상승시켜 몸에 더 좋지 않아서다. 술자리가 몰리는 시기라도 금주하는 날을 정하고, 한번 음주 후에는 적어도 3일은 금주하는 게 좋다. 서홍관 전 국립암센터 원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건배사’처럼 술을 강요하는 문화를 개선하고 당당하게 술을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술을 마시는 건 본인 결정에 따라 본인 건강만 해치는 것이지만, 건배사는 남에게 발암물질을 권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회사 송년회나 동문회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 건배사를 하는 건 발암물질을 다 같이 마시자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연말 음주 폐해 예방의 달을 맞아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술을 따르지 않았다 나의 생각을 따른다’라는 슬로건으로 절주ㆍ금주 캠페인을 최근 시작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술을 권하는 주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금주를 실천하는 모습을 강조한 것"이라며 "나의 건강과 가족을 위해 음주는 자제하고,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연말이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