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저널]김형균 기자=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거듭난 국보 반구대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물 속에 잠겼다. 물속에 잠긴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된다. 수십 년간 반복된 ‘물고문’이 세계유산이라는 타이틀 앞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된 것이다. 등재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시민들은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을 직접 보기는커녕, 물속에 잠긴 문화유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깊은 실망감과 분노를 안고 발길을 돌리고 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현장을 찾은 방문객들의 표정에는 허탈함이 가득했다. 특히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곡천 암각화 박물관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선사시대의 걸작’이라는 해설을 듣고 기대에 부풀어 현장을 찾았지만, 물에 잠긴 절벽뿐이었다.
인천에서 세 가족이 함께 왔다는 한 관광객은 “이 상황을 대체 어디에, 누구에게 항의해야 하는 거냐”고 문화해설사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문화해설사는 “하루 전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하루에 약 10cm씩 수위가 낮아지고 있으니 조만간에 암각화 하단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적 유산을 관리하는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의 침수는 울산의 식수원인 사연댐 때문이다. 이 문제는 수십 년간 ‘문화재 보존’과 ‘시민 식수원 확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해묵은 난제였다. 오랜 논쟁 끝에 정부와 울산시는 사연댐 옆 여수로에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조절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수문 완공 시기는 2030년으로, 앞으로 최소 5년간은 매년 여름철 홍수 때마다 암각화는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시민사회에서는 즉각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전문가는 “사연댐 여수로에 대형 양수기 몇 대만 동원해도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식수원 문제 해결까지 시간을 벌려는 얄팍한 속셈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앞으로 5년은 반구대 암각화에게 가장 혹독한 시간이 될 전망이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위상 덕에 국민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매년 침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물에 잠긴 세계유산’이라는 오명 또한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보존이냐, 물 문제 해결이냐는 해묵은 논쟁은 해결되기는커녕, 방문객들의 원성과 국제적 망신 속에서 더욱 치열하고 소모적인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문화재청, 환경부, 울산시는 탁상공론을 멈추고 당장 눈앞의 침수라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비상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적 자랑이 국민적 실망과 분노로 바뀌기 전에, 국가 차원의 결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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