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세기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은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다. 이제는 인공지능(AI) 기반 진단기기, 로봇 수술기, 디지털 치료기기 등 고부가가치 첨단 기술 의료기기를 국내에서 자체 개발·생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의료기기 산업은 이제 단순한 제조업 범위를 넘어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의료 체계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를 직접 체감해 온 입장에서 산업의 괄목할 만한 도약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뿌듯하다.
이러한 의료기기 산업의 성장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가장 주목할 요소 중 하나는 우리나라 '건강보험 제도'였다.
건강보험은 가격을 통제하는 구조로 인해 기업들에게 수익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품의 대중화와 빠른 보급을 촉진하는 요인이 됐다. 많은 의료기기 기업은 제한된 가격 구조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효율성을 개선하고, 기술력으로 차별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
산업의 제도적 기반이 본격적으로 마련된 계기는 '2003년 의료기기법 제정'이다. 이전까지 의료기기는 의약품 법령에 일부 포함돼 모호한 규제로 인해 제품화와 사업화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의료기기법은 의료기기만의 특성을 반영해 정의, 분류, 심사, 관리 체계를 정립함으로써 산업 전반에 명확한 기준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는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연구개발과 제품화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고, 시장에 보다 안전하고 신뢰도 높은 제품을 공급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산업 발전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핵심 요소는 '정부의 지속적인 정책적 지원'에 있다. 2020년 '의료기기산업 육성 및 혁신의료기기 지원법(의료기기산업 육성법)'이 제정되면서 산업 육성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제도적으로 구체화했다. 이 법은 기술 개발 지원, 산업기반 조성, 수출 지원 등 다양한 지원 수단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21년에는 혁신의료기기 신속 허가 제도가 강화되면서 기존 허가 절차보다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특히 인공지능(AI) 진단기기, 디지털 치료기기와 같이 신기술을 접목한 제품들이 빠르게 상용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정책과 제도의 연속성은 의료기기 산업의 꾸준한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결정적인 힘이 됐다.
최근 정부는 규제 개선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혁신기기의 조기 사용 허용 △임상시험 및 기술심사 제도의 간소화 △심사 기간 단축 등은 기업들의 제품 개발 부담을 줄이고 시장 진입을 가속화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규제가 단순히 산업을 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환자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산업을 건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한 제어장치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특히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현재, 의료기기 역할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고령자 친화형 제품 개발, 가정 내 자가 진단 및 치료 장비 보급, 병원 외의 커뮤니티 기반 건강관리 기기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산업계 역시 여러 측면에서 전략적 준비가 필요하다.
앞으로 의료기기 산업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규제 전문가와 품질관리 인력 양성 △국제 규제 기준에 대한 대응 역량 확보 △해외 진출을 위한 전략적 정보 제공 △관련 산업(IT, 바이오, 로봇 등)과의 융합 확대가 중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또 국내 시장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글로벌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현지화 전략과 파트너십 구축 등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다.
이영규 한국의료기기협동조합 이사장 kmda@medine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