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11월 1일, 세 명의 사나이가 프랑스 파리 리볼리가(街) 59번지에 위치한 건물 입구를 통과했다. 이곳은 금융회사가 파산하면서 14년째 방치된 7층짜리 오스만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 세 명의 사나이 이름은 가스파리 들라노에, 칼렉스, 브루노 뒤몽이었고 모두 예술가들이었다. 곧 또다른 예술가들이 이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건물은 예술가들에 의해 강제 점거되었다. 온갖 쓰레기는 깨끗하게 치워지고 스튜디오들이 만들어졌다. 예술가들은 창작 공간부터 과정, 예술적 담론까지 방문객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하였다.
당시 이곳은 ‘로베르네 집’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리볼리 59’로 변경되었다. 공공기관이나 갤러리가 운영하는 기존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대안 예술 공간이다. 1999년에만 4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방문하는 등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이듬해 법원은 예술가들에게 강제 추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은 실현되지 않았다. 예술가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손에 꼽히는 관광 명소로까지 이름을 알리게 되자 행정 당국은 결국 이 건물을 매입하고 예술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기 때문이다.
2023년 여름, 리볼리 59를 방문했을 때 예술가들의 연대가 발생시키는 매우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힘은 일방적이거나 우월한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연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곡선적이면서도 질긴 연대의 힘이었다. 나선형 계단 벽면의 가득찬 벽화와 설치 작품들을 거치면서 각 층에서 보고 만난 삼십여 명의 작가들은 한결같이 밝은 기운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부지런히 명함을 나누어 주었다. 이 건물에서 갖춰진 연대는 이렇게 또 다른 연대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와 연계한 전시 <이 문장은 검열되었습니다>를 보기 위해 서신갤러리 한옥마을관에 들어섰을 때였다. 전시에 참여한 다섯 작가의 작품들이 오랜 먼지와 더께 속에서 함께 자리잡고 있었는데 별안간 이곳에서 리볼리 59와 같은 공간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유휴 공간에 작품이 설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시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갤러리를 벗어나 거리나 대지로, 유휴 공간으로 침투했으니까.
그러다 최근 이애선 관장(전북도립미술관)에 의해 조사된 내용을 듣게 되었다. 이 건물이 주한 미공보원(추정), 전주예술회관, 전주시립도서관, 전주성모간호교육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1952년에는 전라북도미술제를 비롯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고, 1978년에는 전북현대미술제가 개최된 공간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었다.
그제야 이 건물이 간직했던 기억들을 나에게 나눠주는 것처럼 그날 본 어둡고 축축한 공간들이 머릿속에서 환하게 밝아졌다. 1950년대부터 전시를 마련하고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와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도서관이었을 때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던 서가들. 전주성모간호교육원으로 이용될 때에는 간호 교육을 받으며 취직의 꿈을 안고 깔깔 웃는 누군가의 누이들이 머릿속 공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의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이 공간의 기억들과 닿았고, 2년 전에 보았던 활기차고 예술적 기운이 가득한 리볼리 59가 문득 떠올랐던 걸까.
서신갤러리 한옥마을관은 미술사적인 사료 가치가 충분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 의미 있는 공간이 의미 있게 점거당할 권리를 꿈꿔 보는 것이다. 파리시처럼 행정당국에 의해 이 멋진 공간이 구입되고, 예술인들이 연대하고, 활용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유치석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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