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보크 전 독일 외교장관, 167표로 당선
러, “조부가 2차대전 당시 나치 장교” 반대
결국 합의 추대 대신 비밀 투표 끝에 선출
아날레나 베어보크 전 독일 외교부 장관이 임기 1년의 유엔 총회 의장에 선출됐다. 앞서 베어보크의 의장 도전에 반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때문인지 기권 표가 여럿 나왔다.
2일(현지시간) dpa 통신에 따르면 이날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새 유엔 총회 의장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됐다. 188개 회원국 대표가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베어보크가 찬성 167표, 기권 14표, 무효 7표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여성이 유엔 총회 의장이 된 것은 이번이 5번째다.

베어보크는 “나는 정직한 중개인이자 통합자로서 유엔을 이끌고 싶다”며 “제 사무실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독일 외교장관으로서 정치 경험을 쌓은 베어보크 의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며 “유엔 역사상 5번째로 여성 유엔 총회 의장이 탄생한 것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은 회원국 모두가 참여하는 총회보다는 거부권을 지닌 5대 상임이사국을 비롯해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된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힘이 훨씬 더 세다. 자연히 총회를 이끄는 의장의 권한은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다. 다만 오는 2026년이면 10년 임기가 끝나는 구테흐스의 뒤를 이을 새 사무총장 등 몇몇 유엔 고위직 인선에서 총회 의장의 막후 영향력 행사는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베어보크가 유엔 총회 의장으로 뽑히는 과정에서 몇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먼저 그의 조부인 발데마르 베어보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SS(Schutzstaffel·친위대) 사단 소속 장교로 동부 전선에서 소련(현 러시아) 군대와 싸웠다는 점 때문에 러시아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점을 들 수 있다. 지난달 유엔 주재 러시아 대표부는 “발데마르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을 숭배하는 나치 열성 당원이었다”며 베어보크는 유엔 총회를 이끌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에 베어보크는 “내 할아버지의 경력에 관한 러시아 측의 설명에는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반박했다.

이번에 유엔 총회 의장 선거가 관행과 달리 비밀 투표로 치러진 것도 러시아의 요구 때문이다. 투표 결과가 공개되면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할까 봐 우려하는 나라들이 마음 놓고 기권 또는 반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14개 회원국이 기권 표를 던졌는데, 여기에는 러시아도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정부가 막판에 유엔 총회 의장 후보를 바꾼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애초 독일이 유엔 총회 의장을 배출하는 것으로 양해가 이뤄진 가운데 정통 외교관 출신인 헬가 슈미트 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사무총장이 그 직위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 2월 실시된 총선 결과 연립정부를 꾸리게 된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과 사회민주당이 의회에서 녹색당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며 사정이 바뀌었다. 녹색당을 이끄는 베어보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슈미트 대신 그에게 유엔 총회 의장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이 같은 뒷거래에 불만을 품은 7개국 대표는 슈미트에게 표를 던져 무효 처리가 되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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