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국제공항 청사 1층에서 국제선 탑승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은 검은색 엽서로 가득 차 있었다. 엽서에는 세상을 떠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를 그리는 사연이 또박또박 적혀 있다. “우리 엄마 우리 누나 못 지켜줘서 미안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말을 못 해줬네. 꿈에서라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 게….” 어린아이가 쓴 듯한 서툰 글씨체가 읽는 이의 마음을 더 먹먹하게 만든다.
지난 17일 찾은 무안공항은 거대한 추모공간이었다. 청사 내부에는 ‘우리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쓰인 문구가 곳곳에 보였다. 청사 외부는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근조화환이 줄을 이었다. 멀리 공항 밖 활주로 인근 철제 울타리에는 수백개의 검은색 리본이 바람에 흔들렸다.
항공기 참사 20일 만에 합동추모
철저한 진상 규명과 유가족 지원
탄핵 정국 휩쓸려 소홀해선 안돼
179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어간다. 국내에서 발생한 최악의 항공기 사고인 이번 참사는 우리 앞에 많은 과제를 던져준다. 2014년 세월호, 2022년 이태원, 2023년 오송지하차도에 이은 이번 참사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참사의 당사자가 나와 내 가족일 수 있다는 서늘함을 느끼게 하고, 우리 사회의 대응 능력과 자세가 아직도 이런 수준인가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인명 피해를 늘린 원인으로 지목되는 콘크리트 방위각시설을 둘러싼 초기 국토교통부의 ‘규정준수’ 해명은 많은 이들을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그 단단한 콘크리트에 비행기가 부딪치며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는데도, 계속 규정준수를 말하는 건 책임회피로 들렸다. ‘규정 괴물’이란 비난도 나왔다. 결국 박상우 국토부 장관이 “제가 생각해도 세이프티존 부근에 그런 시설이 있는 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개선할 것”이라고 말하며 일단락됐다. 사고조사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을 두고 셀프조사 논란도 상당했다.
조류퇴치를 위한 시설과 활동도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 철새 도래지 인근에 공항을 만든 것이 적절했느냐는 문제도 제기됐다. 제대로 된 정비가 어려웠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부실한 정비실태가 드러났다. 비행기 엔진 두 개 모두가 멈췄고, 블랙박스에 마지막 행적 4분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나오면서 기체결함 문제도 제기된다. 하나하나 밝혀내야 할 일이다.
“유가족들의 시간은 사고가 나기 전에 멈춰있다. 열심히 살아온 그분들의 인생은 저희가 이어야 한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한을 풀고 싶다. 하나의 숨김도 거짓도 없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참사 원인을 밝혀주길 바란다.” 박한신 유가족 대표는 이렇게 호소한다.
정부는 사고 항공기와 동일한 기종의 항공기에 대해 특별안전점검을 진행했다고 한다. 정비 이력, 정비점검 시간 등 전수점검을 완료했으며 조종사 교육훈련 실태도 점검했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2015년부터 매년 ‘국가안전대진단’이라는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이번 참사는 국가안전대진단에도 상당한 허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있다.
참사 피해자와 희생자 유족을 향한 일각의 근거 없는 악성 댓글과 허위사실 유포도 철저히 조사·처벌해야 한다. 재난과 그에 따른 피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재난에 따른 직접적 위해다. 사망·실종·부상·재산 손실 등 재난 자체에 기인한 것으로 도미노처럼 신체적·정신적 질병, 트라우마·실직·가족관계 훼손·사회생활 곤란 등을 야기한다. 둘째는 구조적 폭력과 피해다. 시혜적 재난피해 지원, 진상규명의 좌절, 관대한 처벌 또는 불처벌 등이다. 셋째는 문화적 폭력과 피해다. 유가족다움의 요구, 피해자 비난, 책임부인, 편파·왜곡·선정 보도 등이다. 재난의 직접 피해와 고통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만,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은 잘 드러나지 않고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유가족다움의 사회적 낙인과 대응전략’, 유해정). 경찰은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악성 게시글에 대한 엄정 수사를 밝혔고, 국회는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2차 가해 방지 및 엄정 대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합동 추모식 이후 정부의 피해자 지원단도 출범했다.
탄핵 정국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유족지원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성과를 얻을 수 있는데,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 제대로 진행될지 우려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더 철저히, 더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게 멈춰있는 유가족의 시간을 다시 앞으로 가게 만드는 길이다.